2023-04-26
E美지 26호/문학
시인이라는 이름이 아름다운 설미희
사랑이라는 환상
친한 친구들이 결혼을 해서 혼자 남게 되자 외로웠다. 상계동에 있는 뇌성마비복지관에 놀러갔다가 장애인 친구들을 만났는데 장애인 부부들이 서로 아끼며 재미있게 사는 모습을 보니, 같은 장애를 가진 사람들이 사귀면 육체적으로는 힘들어도 정신적으로는 편안할 것 같아서 친구의 소개로 만난 뇌성마비 남자와 결혼을 했다.
사랑하면 장애, 경제, 시댁과의 문제 모든 것이 해결될 수 있다는 결혼에 대한 환상을 갖고 있었다.
하지만 남편은 결혼식 후 보름이 지나자 변했다. 언어폭력으로 시작해서 화가 나면 물불 가리지 않고 폭력을 휘둘렀다. 남편에게는 빚이 있었고, 남편은 7남매의 막내이지만 가족의 지원을 받지 못했다.
결혼 후 7개월에 들어선 아기가 그녀에게 가정을 지켜야 하는 이유를 만들어 주었다. 아들은 영재 소리를 들을 정도로 공부를 잘 해서 그녀를 행복하게 해 주었다.
별거를 결심하고
아들이 열 살이 되었을 때 그녀에게 병든 시어머니를 수발해야 하는 상황이 생겼다. 뇌성마비로 본인 몸도 가누지 못하는 설미희 그녀가 시어머니 기저귀까지 채워 드려야 하는 중노동 속에서 몸과 마음이 피폐해졌다. 그래서 남편에게 별거를 선언하고 아들에게 누구와 살 것인지를 물었더니 엄마와 살겠다고 했다.
아들과 함께 집을 나왔다.
10년 만에 남편에게서 벗어났지만 법적으로 자유로워질 때까지 다시 5년이 걸렸다.
별거 중에도 남편은 힘든 일이 생기면 그녀를 불렀다. 뇌수술을 두 번이나 했는데 병간호를 그녀가 해야 했다. 남편 형제들 그 누구도 도와 주지 않았기 때문이다. 남편 병수발을 하느라고 꼼짝을 못하자 수녀가 된 친구가 병원으로 그녀를 만나러 왔는데 설미희 그녀 앞에 펼쳐진 상황을 보더니 이렇게 말했다.
“미희야, 이제 그만해라.”
그 후 여성 단체의 도움으로 이혼소송을 하게 되었다. 1심에서 원고 승소를 받았지만 남편은 항소를 하였다. 병원에 입원해 있을때 아내가 한 번도 오지 않았고, 정신적으로 문제가 있는 여자라고 주장하였다.
여성 단체에서는 보통 1심 재판까지만 도와주는데 설미희 그녀의 사정을 알고 2 심도 도와주었다. 증거자료를 모으러 다녔을 때 고맙게도 모두 다 잘 도와주었다.
판사가 판결을 내리며 설미희 그녀에게 말했다.
“절대로 딴 남자 만나지 마세요.”
그녀가 너무 어리숙하여 또다시 험한 일을 당할까 봐 걱정이 되었던 것이다.
살기 위해 공부하고 일하고
어린 아들을 데리고 어떻게 살아갈지 막막했다.
장애가 없다면 식당 설거지라도 하면 되지만 장애인은 할 수 있는 아르바이트가 없었다. 사업을 하는 목사님을 찾아가서 양말 장사를 하겠으니 물건을 받아다 주십사 부탁을 했더니 수수료를 뗀다고 하여 그냥 나왔다. 수수료를 떼고 나면 남는 것이 없기 때문이다.
취직을 하려면 이력서를 써야 하는데 학력이라도 갖추면 조금 수월해지지 않을까 하여 방송 통신대학교 국문학과에 입학을 했다. 학교 공부를 하며 자립생활지원센터에서 일을 했다.
국문학과를 졸업한 후에는 사회복지학과로 편입하였다. 사회복지사가 되면 센터에서 오래 도록 근무할 것이란 기대에 그녀는 공부에 매진했다.
하지만 장애인복지 현장도 장애인에게 마냥 일자리를 주지 않았다.
2020년에 회기동에 로또방을 열었다. 보증금 500만 원에 월세 44만 원인 보잘것없는 가게였지만 대학가라서 분위기가 좋았다.
손님을 기다리며 책을 읽을 수 있어서 좋았고, 구몬 학습지 국어와 한문을 신청하여 문제를 풀며 공부하는 재미도 있었다. 하지만 송파에서 동대문 까지 매일 출퇴근을 하자니 몸이 많이 상했다. 벌이도 시원치 않아서 1년 반 정도 하고 그만두었다.
글을 쓴다는 것은
아이를 키우다 보면 엄마 숙제도 있었다. 선생님이 엄마가 글재주가 있다고 칭찬해 주셨다는 얘기를 전해 듣고 선생님이 어렵게 사는 모자에게 용기를 주시려고 좋은 말씀을 해 주었다고 생각했다.
학교 공부를 하면서 문학에 대한 꿈을 키우게 되었지만 어떤 시도도 하지 못했다.
그러다 장애인문학지 『솟대문학』이 있다는 것을 알고 2009년 작품을 보냈는데 설미희라는 이름으로 작품이 실려서 무척 고무되었다. 나락으로 떨어졌다가도 문학작품이 그녀를 끌어올려 주곤 했다.
이런저런 공모전에 응모하여 낙방도 하고 당선도 하면서 어느새 설미희는 시인으로 성장하였다. 이것은 본인 자신을 위한 도전이기도 했지만 아들에게 부끄럽지 않은 엄마가 되기 위해서였다.
아들도 벌써 26세가 되었다. 이혼 가정, 장애인부모 가정에서 다른 아이들이 겪지 않아도 되는 어려움을 겪었지만 아들은 아주 반듯하게 컸다.
대학에서 사회복지를 전공했지만 엄마는 아들이 종교인이 되지 않을까 생각한다.
이제 설미희 그녀의 나이도 56세이다.
아들도 독립을 했고, 이혼 후에도 궂은 일이 생기면 연락을 하던 남편도 세상을 떠났다.
이제 오롯이 본인 시간이다. 앞으로 그동안 쓰지 못한 작품을 완성해 가면서 작가로서의 도전을 하며 큰 욕심 없이 살아갈 것이다.
나의 영원한 벗! 글 친구에게
글 친구 안녕!
굴곡진 인생길에서 50대 중반을 훌쩍 넘도록 함께하고 있는지 곰곰이 생각을 해 봤습니다.
처음 만났을 때가 초등 시절 6학년 때인 것 같습니다.
덩치가 높은 산 같고 목소리는 운동장 끝에서 끝으로 들릴 만큼 우렁찬 호랑이 담임 선생님께서 한 학기를 마무리하면서 친구에게 편지를 쓰라고 했었습니다.
줄무늬가 있는 편지지를 책상에 펼쳐 놓고 ‘미숙아! 고마워.’ 이 한 마디 써 놓고 더 쓸 말이 없어서 한 시간 내내 책상만 내려다보았습니다.
여백의 편지지가 엄청 넓게 보이고 그 공간을못 채우는 제가 무척 부끄러웠습니다.
친구 박미숙에게 고마운 마음을 글로 전달하지 못하는 무지한 마음에 한동안 친구 곁을 갈 수가 없었습니다.
가정을 어머니 홀로 꾸려 가는 형편이다 보니 책이라면 교과서뿐이었지만, 국어책을 읽고또 읽고 그러면서 한글 받침도 깨우치게 되었습니다.
친구 박미숙을 만난 것은 기적이었습니다.
친구의 꿈은 수녀였습니다.
그리고 흔들림 없이 그 꿈을 이루어 어려운 이웃을 위해 한평생 하느님의 사랑을 실천하며 살고 있습니다.
호랑이 선생님은 우리의 우정을 어여쁘게 여겼고 교편생활 중 가장 잊을 수 없는 제자라고 하셨습니다.
2022년 구상솟대문학상을 받는다고 연락을 드렸을 때
“나에게 기쁨을 주는 제자구나! 울 제자는 예나 지금이나 한결같은 이미지 알프스 소녀 하이디야….”
몇 해 전 친구 수녀와 선생님과 재회했을 때, 선생님은 진심으로 행복해하는 모습으로 말씀을 하셨습니다.
“변함없는 두 사람의 우정을 보고 있으니 선생님이 뿌듯하구나! 특히 미희가 제일 걱정스러웠던 제자였었는데 이리 작가가 되어 자신의 삶을 잘 살고 있으니 선생님이 보람을 느낀다.”
이렇게 두 사람의 한결같은 사랑으로 글 친구의 씨앗을 가슴 깊이 심을 수 있었습니다.
두 번째로 만난 것은 여고 학창 시절 2학년 때인 것 같습니다.
여름방학 중인데도 치열했던 대학 입시로 보충수업을 했었습니다.
그날도 이른 아침 뚜벅뚜벅 무거운 가방을 메고 학교로 향하고 있었습니다.
저 앞쪽에서 광고지를 들고 남자 장애인이 절 향해 걸어오고 있었습니다.
‘저분이 무슨 이야기를 할까? 제발 그냥 지나치면 좋겠다.’고 생각을 했었습니다.
솔직히 말하자면 그 시절 저보다 경한 장애인만 보아 오다가 중증 장애인을 처음 보았고 또한 허름하고 가까이 다가올수록 그분 특유의 냄새가 나 그분이 뭐라고 이야기를 하는 순간 제대로 걷지도 못하는 제가 뒤뚱뒤뚱 학교로 도망을 쳤습니다.
그 후 전 수업을 제대로 들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분을 외면했다는 죄책감에다 저도 장애인인데 다른 사람들도 제가 느꼈던 그 마음을 저를 보고 똑같이 느끼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전 그 이후부터 제가 왜? 살고 있는지… 제 실존에 대해 생각을 했었습니다.
아무리 생각하고 생각해도 희망은 보이지 않았고, 점점 제 안으로만 갇히고 말았습니다.
성적은 점점 떨어지고 소위 말해 사춘기 앓이를 했었던 같습니다.
주룩주룩 하염없이 비가 내렸던 날. 전 굳은 결심을 하고 약국을 찾아 돌아다녔습니다.
그런데 한 군데에서도 제가 원하는 약을 단 한 알도 팔지 않았습니다.
그렇게 헤매다가 주저앉아 버렸습니다.
‘마음처럼 되는 것이 하나도 없네. 그럼 사는 날까지 살아야지.’ 라디오를 친구 삼아 엽서도 보내고 제 글이 채택돼 DJ가 읽어 주는 날이면, 세상이 제 편인듯 기분이 좋았습니다.
그렇게 전 자신을 찾아갔으며 숱한 밤을 스스로에게 쓰는 편지를 쓰면서 위안을 받았습니다.
끝으로 글 친구를 만난 것은 30대 중반인 것 같습니다.
장애인으로서 결혼을 결심했다는 것은 큰 모험이며 용기였습니다.
장애인 부부 가정에 초대되어 갔을 때 서로 도우며 사는 모습이 신세계를 만난 것 같았습니다.
그리고 그 내외가 소개해 준 분과 생애 첫 연애를 했었습니다.
‘같은 장애면 더 잘 이해하겠지… 몸은 힘들어도 정신적으로는 편하겠지….’ 섣부른 생각은 그저 꿈일 뿐이었고, 결혼 생활은 그때까지 맛보지 못했었던 그야말로 여러 맛이 어우러진 인생의 종합선물세트였습니다.
첫째, 장애가 있지만, 스스로 몸 청결과 치장을 할 수 있어야 한다.
둘째, 가정 경제와 가사를 남편 도움 없이 처리할 수 있어야 한다.
셋째, 남편에게 시댁 식구와의 유대 관계를 이어 줄 끈이란 기대는 하지 말아야 한다.
넷째, 난제가 생겨도 무조건 받아들이며 책임을 져야 한다.
이런 마음가짐으로 10년이란 세월을 군소리 없이 살았지만, 변하는 것은 하나도 없고 더더욱 어려운 상황과 신체와 정신적으로 감당할 수 없는 일이 벌어졌습니다.
결국 별거를 선택한 후 양육비와 생활비 지원을안 해 줘 여성 단체의 도움으로 이혼소송을 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긴 긴 시간을 어찌 버티고 지금 이 자리에 있는지 제가 생각해도 참으로 신기할 뿐입니다.
전 저를 진심으로 아끼며 사랑합니다.
제 詩가 연민적인 색깔을 지녔지만, 그 또한 제 삶을 지탱하는 치유제였습니다.
글 벗을 만나 제 삶은 180도 변했습니다.
소유할 수 없는 행복을 내려놓았더니 인생은 외면하지 않고 감사하는 마음과 들에 핀 이름 모르는 풀도 곱게 보이며 느낄 수 있는 행복을 선물로 받았습니다.
나는 하얀 연꽃이고 싶습니다.
탁한 웅덩이 속에서도 순백의 영롱한 빛 발하며 꼿꼿이 피고 싶습니다.
풍파가 불어도 괜찮습니다.
해충이 날아와 생채기가 나도 괜찮습니다.
배려 없는 사람이 송이를 송두리째 꺾어도 괜찮습니다.
피고 지고 또다시 피어난다는 것을 이젠 알기에
하나도 아프지 않고 하염없이 기다리며 꿈을 꿀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