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06-12
E美지 28호/음악
박영필의 외침, 나는 성악가이다
마냥 즐거웠던 시절
박영필은 1979년 부산 연제구 망미동에서 3남매의 막내로 태어났다.
아버지는 택시운전을 하셨는데 생활비를 제대로 갖다 주지 않았다. 그래서 어머니가 용호시장에서 생선 장사를 하며 3남매를 키우셨다.
대학에 갈 형편도 아니었기에 기타치고 노래 부르면서 중학교 시절을 보내다 졸업이 다가왔다. 돈을 벌어 어머니를 조금이라도 도와드리고 싶어서 성지공고 자동차과에 입학을 했다.
그리고 대학은 한창 인기가 있던 컴퓨터 관련 전공 동명전문대학 전자계산과에 입학을 했다.
1학기를 마치고 나니 IMF가 터졌다. 등록금 마련할 길이 막막했다. 군에 갔다 오면 IMF도 끝이 나겠지싶어 군대를 자원했다.
몸에 이상 증상이 나타나고
제대 후 학교를 졸업하고 인터넷 AS기사로 일을 하다가 좋은 직장에 다니고 싶어 서울로 와서 고시원에 짐을 풀고 이력서를 쓰고 있는데 팔에 힘이 빠졌다.
몸에 이상이 생겼다는 것을 직감할 수 있었다.
짐을 챙겨 다시 부산으로 내려 왔다. 동네 병원에 가니까 큰 병원으로 가보라고 했다. 그래서 백병원에서 CT와 MRI를 찍는 등 정밀 검사를 받았다.
희귀난치성질환인 모야모야병 진단을 받고 왼쪽 뇌수술을 했다. 몸을 추스른 후 공무원시험 준비를 했는데 시력이 흐려지기 시작했다. 병원에 가니 안과에는 이상이 없고 왼쪽 시신경에 마비가 오고 있으니 이번에는 오른쪽 뇌수술을 해야 한다고 했다.
수술 후 팔 다리의 마비증상은 좀 나아졌는데 눈은 여전히 흐릿했다.
의사가 6개월쯤 지나야 알 수 있으니 지켜보자 하여 집으로 돌아왔지만 시력이 점점 떨어졌다. 눈도 깜깜하고, 앞날도 깜깜할 뿐이었다.
새로운 길을 찾아
친구가 인터넷에서 시각장애인에 관한 정보를 찾아 주면서 장애인등록을 하라고 했다.
2008년 시각장애 1급으로 등록을 했다.
그리고 장애인복지관에서 점자를 배웠다. 점자교사와 나이가 비슷하여 친구처럼 가깝고 지냈는데 어느날 저녁을 먹고 노래방에 가게 되었다.
“우와~~영필 씨, 가수다. 가수!”
그날 영필은 그저 추켜세워주는 칭찬이라 생각했지만 점자교사는 적극적으로 노래 공부를 권했다.
“서울 한빛학교에 음악전공과가 있어요. 2년 과정인데 그 정도만 배우면 영필 씨는 성악가가 될 수 있을 거예요.”
점자교사의 권유로 한빛학교에 가서 오디션을 보았는데 합격이 되었다. 그는 망설이지 않고 짐을 싸서 학교로 향했다.
영필은 2009년부터 성악 공부를 하면서 합창단, 중창단 활동을 하였다.
졸업 후에는 시각장애음악인들로 구성된 한빛예술단 단원으로 안정적인 음악활동을 할 수 있었다.
해외공연을 갈 기회도 많았다. 국내 공연보다 관객들의 반응이 뜨거워 해외공연이 잡히면 용기도 얻고 그 나라 문화도 즐길 수 있었기에 영필은 해외공연으로 삶의 충전이 되었다.
행복한 남자, 박영필
박영필은 다양한 레퍼토리를 가진 성악가이다.
그만큼 실력이 있고, 노력파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그가 아리아 ‘남몰래 흐르는 눈물’을 부르면 관객들은 저절로 눈을 감고 노래에 빠져든다. 그 노래는 그가 겪었던 그의 인생사가 진하게 담겨 있어 그의 진심이 다 표현되기 때문이다.
7년 전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가난과 질병 속에서 모진 고생을 하신 어머니는 고향인 부산에 살고 계시는데 아들 때문에 걱정이 많으신 어머니를 정말 기쁘게 해드린 일은 5년 전 결혼을 한 것이다. 2016년 어학공부를 하는 온라인 공간에서 알게 된 일본 여성과 2018년 결혼을 하였다.
한빛예술단 단원으로 연 100회 이상의 공연을 할 수 있는 것도 박영필을 행복하게 만든다.
그는 마음껏 노래를 부르며 예술의전당 무대에 서보고 싶은 소박한 꿈을 가진 진짜 행복한 남자이다.
박영필
남, 시각장애, 성악가
세종사이버대학교 사회복지학과
한빛예술단 솔리스트
장애인문화예술경진대회 성악부문 우수상
2021~2019 한빛예술단 MUSIC in the DARK
2017 브라질 상파울 주정부 초청 3개 도시 한빛예술단 순회공연 등 다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