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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애인예술 소식을 정기적으로 전해드립니다.
2025-10-31
E美지 37호/대중예술
조용한 춤꾼, 한국무용가 김영민
성장기의 영민

영민은 1962년에 충남 아산에서 태어났고, 서울농학교 근처에서 외할머니와 함께 살았다.
태어나서부터 청각이 손상된 선천성 난청인데, 부모는 물론 1남 4녀 중 다른 자녀 에게는 농인이 없었기에 영민에게 청각장애가 있을 것이라는 생각은 단 한 번도 하지 않았다.
첫아이라서 육아에 경험이 없는 부모는 아기가 순하다고만 생각했다.
영민의 무용 재능을 키워 준 것은 할머니이다. TV에 무용이 나올 때마다 영민을 불렀다.
할머니는 춤을 무척 좋아하셨기 때문에 손녀와 함께 무용을 보시고는 영민에게 말했다.
“영민아, 저거 너두 할 수 있제? 한번 해봐라.”
TV에서 본 춤을 춰보라고 하면 영민은 할머니 앞에서 바로 그 춤을 흉내내곤 했는데 할머니는 손녀의 춤을 보면서 손뼉을 치셨다.
“영민이 네가 저 얘들보다 더 잘 춘다.”
할머니가 잘한다고 칭찬을 하니까 영민은 TV에서 춤을 추면 따라서 춤을 췄다.
그렇게 어렸을 때 TV에 나오는 춤을 흉내 낸 것이 무용을 습득하는데 큰 도움이 되었다.
어머니는 청각장애인의 우상인 운보 김기창 화백처럼 미술을 하기를 원하셔서 딸이 무용을 하는 것을 반대하였다.
청각장애인은 소리를 듣지 못하기 때문에 음악에 맞춰 동작을 하는 무용은 할 수 없다고 생각했다.
청각장애인은 시각적인 요소가 많이 작용하는 미술을 선택하는 것이 최선이라고 믿었기에 영민을 미술학원에 보냈다.
“영민아, 너는 운보 김기창 화백처럼 멋진 화가가 될 수 있어!”
그래서 한때 어머니 말씀에 순종해서 무용을 잠시 접고 미술 공부를 했다.
미술학원에 앉아 있으면 시간이 가지 않아서 지루했다. 물론 그림을 그리는 것도 좋아했지만 유화 물감 냄새 때문에 머리가 아팠다.
그리고 성격상 오래 앉아 있지 못해서 그림 그리기가 싫었다. 벌떡 일어나서 몸을 움직이고 싶었다.
결혼과 출산
영민은 유치원부터 고등학교까지 농아학교에 다녔다.
당시는 장애아의 통합교육은 꿈도 꾸지 못할 때였다.
영민의 학교 밖 생활은 교회였다. 그곳에 가면 농인 친구들을 많이 만날 수 있어서 좋았다.
그녀는 무용을 하면서 다듬어진 외모여서 처음 보는 사람들이 관심을 보이며 말을 걸었다.
성격이 활달한 편이라 농인들이 말을 걸면 금방 잘 어울렸지만 건청인이 말을 걸면 어떻게 해야 할지를 몰라 피하곤 했다.
소통에 어려움이 생기면 마음이 불편했던 것이다.
영민은 교회에서 알게 된 오빠와 사랑을 하게 된다. 가장 풋풋했던 나이인 열여덟 살에 만나서 스물다섯 살에 결혼하였다. 7년 동안 연애를 한 것이다.
두 사람은 서로 사랑하기에 결혼을 빨리 하고 싶었지만 부모님의 반대가 심했고, 학교 선생님들도 반대를 하셨다.
남편이 농인이 어서가 아니라 남편의 경제력으로는 영민이 결혼 생활을 하는데 어려움이 많을 것이라는 판단 때문이었다.
두 사람은 부모님이 허락할 때까지 기다리기로 하였다. 자식 이기는 부모 없다고 마침내 허락을 해 주시어 1987년에 결혼식을 올렸다.
영민은 공연 준비로 바빠서 차분히 가정살림을 할 수 있는 시간이 없고, 지방 공연으로 집에 들어오지 못하는 날도 많았지만 남편은 단 한 번도 아내의 활동을 반대하지 않았다.
오히려 아내의 활동을 경제적으로 지원해 주지 못하는 것을 늘 미안해 하였다.
늘 말없이 지켜보면서 예술인 아내를 자랑스러워하는 듬직한 남편이다.
자녀로 외동딸이 있는데 다행히 청력이 건강한 건청인이다.
부모에게 모두 청각장애가 있으면 자녀에게도 청각장애가 발생할 확률이 높다고 하지만 부부는 그런 문제로 태어날 생명을 거부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임신을 망설이지 않았고 출산 역시 당연한 일이었다.
엄마는 결혼을 승낙하면서 자녀의 장애를 염려하셨지만 부부는 걱정하지 않았다.
모든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하늘에 맡겼다.
그런데 막상 건강한 아이가 태어나자 엄마는 무척 좋아하시며 아기를 키워 주시겠다고 하였다.
“너도 외할머니가 키워 주셨잖아. 네 딸을 내가 키워 주는 게 당연한 거야. 넌, 공연다니느라고 바쁘잖아.”
엄마는 손녀가 농인 부모에게서 자라면 언어발달이 늦어질 것을 걱정하여 외손녀를 키워 주시겠다고 나선 것이다.
그래서 영민의 딸도 영민처럼 외할머니 밑에서 자랐다. 그 덕분에 영민은 공연 활동에 최선을 다할 수 있었다.
딸은 3년 전에 호주인 사위랑 결혼하여 아들 한 명을 키우고 있는데 딸네는 호주에 거주하고 있어서 자주는 못 보지만 잘 살고 있어서 영민의 마음이 편하다.
부모가 농인이라 딸도 알게 모르게 많은 어려움이 있었겠지만 딸은 그런 내색 한번 하지 않고 씩씩하게 자라 주었다.
“엄마가 학교에 가서 선생님께 인사를 드려야 하지 않을까?”
“괜찮아, 우리 엄마는 예술인이라서 공연이 많기 때문에 바쁘다고 했어.”
딸은 엄마가 무용을 하는 예술인이라는 사실에 자부심을 느끼고 있었다.
무용수가 되다

본격적으로 무용을 시작한 것은 20대 초반이었다.
운보 김기창 화백이 세운 청각장애인복지관인 청음회관에서 1987년 청음농아극단이 창단된다는 소식을 접하고 바로 찾아갔다.
농인들이 중심이 되어 활동하는 극단으로, 수어를 활용한 연극 및 무용공연 등을 통해 농문화를 알리고 문화적으로 소통하는 것이 목적이었다.
청음농아극단 단원으로 무용과 연기를 연습하고, 창단 공연인 <혼의 소리>에 참여하여 서울, 원주, 전주, 청주 등 지방 순회공연도 하였고, 1989년 미주 순회공연을 마치고 제25회 백상예술대상 특별상을 받은 데 이어, 1991년에는 두 번째 연극 <탈의 소리> 로 제27회 동아연극상 특별상을 수상하였다.
영민은 그동안 자신에게 무용을 가르쳐 준 스승들을 잊지 못한다.
30대 초반에 수원여자대학교 사회교육원에서 김영실 선생님께 무용을 배웠다. 무용은 눈으로 보고 몸짓으로 배우는 것이라서 눈치껏 따라하며 열심히 익혔다.
하지만 무용 세계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제대로 이해하기 힘들었고 이론은 수어통역 서비스가 없던 시절이라서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다.
우연히 무대 의상을 빌리는 곳에서 국가무형유산 살풀이춤 보유자이신 정명숙 선생님을 알게 되어, 정명숙 선생님 밑에서 10년 정도 춤을 배웠다.
정명숙 선생님은 김영민의 춤을 완성시켜 주신 은인이다.
수어를 전혀 몰라도 선생님은 온몸으로 춤을 가르쳐 주셨다.
영민은 선생님 춤선 하나 하나를 놓치지 않으려고 선생님의 온몸에 시선을 고정시키며 하나라도 더 배우려고 최선을 다했다.
정 선생님은 그렇게 말없이 춤을 배우는 제자를 귀하게 여기셨다.
최근에는 ‘한양춤길 전통무용예술원’에서 전이연 선생님께 무용을 배우며 단원으로서 공연 활동을 하고 있다.
춤은 계속해서 배우지 않으면 발전할 수가 없다.
그래서 항상 춤을 가르쳐 주실 선생님을 찾게 되고 그 선생님 밑에서 배운 춤으로 새로운 작품을 무대에 올리면서 활동을 한다.
전이연 선생님과는 무대에 설 수 있는 기회가 많아 스승이면서도 동료처럼 가깝게 느껴진다.
김영민이 춤을 추는 법

춤에서 음악은 매우 중요한 부분이다.
듣지 못하는 그녀에게는 음악에 맞춰 춤을 춘다는 것이 쉽지 않았다.
단체 무용의 경우에는 소리 대신 눈치로 박자와 동작을 맞추어야 했다. 건청인 동료들에게 소리에 대한 박자와 동작을 물어보면서 미리미리 몸에 익히는 연습을 했다.
다른 사람들은 음악 소리를 기억하고 들으면서 몸을 움직이고 리듬을 타겠지만, 그녀는 음악 소리 대신 연습을 통해 속으로 계속 숫자를 세면서 몸을 움직여야 했다.
양쪽 귀에 보청기를 끼고 미세한 소리 라도 들으려는 노력도 하고, 진동으로 소리를 느끼려고 애써 봤지만 크게 도움이 되지 않았다.
그래서 음악의 흐름을 숫자로 세면서 동작을 따라하는 방식을 선택 했는데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수없이 반복해서 연습을 해야 했다.
수어보이미를 구하는 것이 가장 어렵다.
소리를 듣지 못하는 농인에게는 소리를 듣고 알려 주는 수어통역사 겸 수어보이미가 아주 절실히 필요하다.
그런데 수어통역사는 음악에 약하고, 수어보이미는 수어통역을 잘 못하는 경우가 많다.
두 가지를 다 잘하는 사람은 우리나라에 아직 없는 듯하다.
공연 요청을 받으면 기쁨보다는 도움을 줄 수어보이미를 구하는 걱정부터 하는 것이 사실이다.
수어보이미는 공연 당일에 함께해 주는 것이 중요하지만, 욕심 같아서는 연습할 때부터 함께 호흡을 맞추면서 준비를 해 주는 전문 수어보이미 제도가 있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비버데프(deaf)예술단을 창단하다

2005년 비버데프(deaf)예술단을 창단하고 김영민이 단장직을 맡았다.
예술단 단원들은 모두 농인이다.
초창기에는 수어노래와 한국무용 위주로 공연을 했다.
농인의 언어인 수어로 공연을 하는 것이라 관객들이 따라 부르는 등 반응이 좋았고 이를 계기로 수어배우기가 확산되는 긍정적인 효과가 있었다.
연습 장소는 서대문농아인복지관을 이용할 수 있었고, 운영은 단원들의 회비와 자그마한 공연 수익금으로 어렵게 꾸려 가고 있다.
비버데프예술단은 그녀에게 농인으로서의 존재감을 더욱 드러내는 계기가 되었다.
춤을 좋아하고, 오랫동안 춤을 배우면서 공연을 하였지만 늘 비장애인의 일부 같다는 생각이 들었는데, 농인들과 함께 연습하고, 공연하면서 농인으로서의 자부심이 생겼다.
개인적인 사정으로 그만두는 멤버도 있어서 새로운 멤버를 발굴하고 육성해 나가면서 어려움도 있었지만 그동안 200여 회 이상 공연을 하면서 농인의 예술 활동이 활성화되었다.
영원히 춤꾼이고 싶다

김영민은 무대의상을 입고 우아한 중전마마가 된 기분을 느끼며 춤을 추면서 기품과 절제미를 표현한다. 춤꾼이 아니었으면 누릴 수 없는 행복이다.
수어노래를 할 때는 가사를 전달하기 위해 수어를 마치 춤을 추듯 큰 동작으로 표현한다. 얼굴 표정도 다양하게 짓기 때문에 사람들이 배우해도 잘 했을 것이라고 했다.
김영민은 춤꾼으로 오래오래 무대에 서고 싶은 것이 마지막 소망이다.
특별한 계획이 있다기보다는 춤인생 40여 년이 되고 나이가 들다 보니 요즘은 젊었을 때처럼 보여 주기 위한 겉멋 든 춤사위보다 진정한 춤의 맛과 의미를 느끼며 춤을 추고 있다.
아울러 건강이 허락하는 한 오래오래 무대 위에서, 관객들 앞에서 울림 있는 춤을 선보이고 싶다.
개인적으로는 이런저런 공연을 꾸준히 하고 있지만 이제 나이가 있다 보니 단체공연보다는 단독공연이 편하다.
그리고 자신의 이름으로 새로운 작품을 만들어서 우리 춤의 춤선이 얼마나 아름답고 신명나는 것인지 많은 농인들에게, 그리고 다른 모든 사람들에게 알려 주고 싶다.
효녀 영민
어머니가 나이가 들자 거동이 힘들어지시더니 나중에는 간병이 필요해졌다.
영민은 바쁜 시간을 쪼개어 어머니를 간병하는데 최선을 다했다. 어머니는 큰딸의 간병을 받으며 늘 고마워 하셨다.
“내가 너를 소리를 듣지 못하게 낳은 죄인이다. 미안하다. 네가 무용가로 성공해 줘서 고맙구나.”
영민은 엄마가 자기 마음을 몰라준다고 서운할 때도 있었지만 엄마 마음 한구석에는 딸의 장애에 대한 아픔이 대못이 되어 박혀 있었던 것이다.
어머니는 작년 봄에 돌아가셨다. 살아 계셨을 때는 보고 싶으면 언제든지 달려가서 볼 수 있고, 만질 수 있었지만… 지금은 바람만 불어도 엄마 생각이 난다.
아버지는 올해 95세인데 건강하셔서 혼자서 잘 지내신다.
일정이 없으면 찾아가서 아버지를 보살펴 드린다. 맏딸이기에 자신이 당연히 해야 할 일이라고 생각한다.
효도는 살아 계실 때 하는 것이다.
김영민
살풀이춤 준인간문화재
수당 정명숙 선생님 전통춤 사사
전 수당 정명숙 무용단, 기독무용예술원 단원
한양춤길전통무용예술원 단원
빛소리친구들 객원 단원
비버데프예술단 단장
1989 백상예술상 특별상
1991 동아일보 예술상 특별상
1991 제11회 동경 세계농아인대회 감사장
2003 전국종합예술경연대회 대상, 제8회 고양행주 전국국악경연대회 무용 일반부 동상 자랑스러운 장애인상(내외경제신문 주최), 명량국악대제전 무용 일반부 장려상
2004 전국무용경연대회 무용 부문 금상, 제3회 군산 전국국악경연대회 무용 최우수상
2006 제24회 전국농아인 수화예술제 특별상
2008 올해의 농아인상
2008 제7회 성남시장애인예술제 음악 부문 금상
2010 서울특별시 장애인복지상
2013 제1회 대한민국장애인문화예술경진대회 스페셜K, 한국무용 우수상
2016 서울특별시의회 의장상
2022 제1회 시흥전국무용경연대회 대상
2023 시흥시 국악경연대회 한국무용 대상 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