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11-18

E美지 37호/피플

노래 부르는 장애인 인식개선 강사 김형회

 

 

자신의 건강했던 시절과 휠체어를 사용하는 모습을 시각자료로 보여주며 퀴즈를 내면서 강의를 하는 김형회는 장애인 인식개선 강사로서 인기가 많다. 

 

 

그는 걸어다니던 김형회와 휠체어를 사용하는 김형회는 같은 사람이라는 것을 강조했다.

 

 

장애 수용하는 과정

 

 

2016년 6월, 모처럼 떠난 여행 중에 수영장에서 근사하게 다이빙을 하다가 목뼈를 다쳐 경수 손상으로 전신마비 장애인이 됐다.

누운 병실에서 하늘을 보며 ‘다음 병원은 어디로 가야 할까?’만 고민했다.

약 2년 동안 10여 회에 걸쳐 서울과 경기도 양평, 일산의 병원 4곳을 전전했다.

‘여행 가지 않았다면 어땠을까?’ 생각하고 후회를 하며 과거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20세 때 처음 대학에 갈 때는 행정학을 전공했는데 적성이 맞지 않는 공부라서 군 복무를 마치고 호주로 갔다.

호주에서 쿠커리(cookery)를 목표로 제임스쿡 대학 브리즈번 캠퍼스의 부속기관인 사리나루소에서 공부했는데 흥미롭기는 했지만

유학생 학비가 너무 비싸서 일을 했다.

그러다 호주로 이민을 하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하고 한국으로 돌아왔다.

 

투자이민이 아닌 경우는 전공에 따라 이민 조건 점수를 매기는데 가장 높은 점수가 치과기공이었다.

그래서 2013년 동남보건대학교 치과기공과에 입학하였다.

 

3년 동안 전문학사를 마치고 치기공사로 근무를 하다가 사고를 당한 것이다.

몸에 전기가 오는 것처럼 아프고, 대변을 묽게 하는 약과 진통제 등 매일 7가지 약을 먹는 것도 고역이다.

하지만 살아 있기에 살아가야 했다. 다만 몸을 움직이는 방법이 달라졌을 뿐이다. 장애인으로 살아가는 방법을 배워야 했다.

 

(사)한국척수장애인협회에서 시행 중인 ‘일상홈 프로그램’에 2018년 7월 4주 동안 참여한 게 큰 도움이 됐다.

신청서를 내고 면접을 거쳐 참가자로 선정되면 서울 구로구의 한 가정집에서 사회 복귀에 성공한 척수장애인 코치와 함께 일대일 매칭 방식으로

집안일, 청소, 문화 여가 활동, 차량 탑승, 생활체육 등 다양한 사회 복귀 프로그램을 배웠다.

손이 불편하지만 운전을 할 수 있다는 것도 그때 알았다.

 

그는 2019년, 휠체어를 타고 4년 공부를 채워서 학사가 되려고 학교로 돌아갔다.

치기공사로 업그레이드 된 학사 졸업장이 있어야 취업하는 데 도움이 될 것 같았기 때문이다.

 

 

할 수 있는 일 찾기

 

 


어느 날, 대학 시절 밴드 활동을 했던 것을 알고 있던 물리치료사가 더크로스 활동을 했던 김혁건 씨의 노래 동영상을 보여주었다.

같은 척수장애인인 그가 열창하는 모습에, “나도 할 수 있을 것 같다!”는 희망으로 인생이 바뀌게 되었다.

 

“배에 힘이 들어가지 않으니까, 근육이 물풍선처럼 퍼져요.

복압을 올려 주려고 계속 누르기도 하고, 복대도 차 보고, 결국 살짝 구부려 노래를 부르는 제 방식을 터득했어요.”

 

 

 

 

검색을 해 보니 빛된소리글로벌예술협회가 주최하는 국내 유일의 장애인 스타 발굴 육성 프로그램 ‘제4회 이음가요제’ 소식이 떴다.

김형회는 이음가요제 출전을 위해 6개월 동안 <그래서 그대는>이라는 노래를 연습했고, 그 결과 대상을 거머쥐게 됐다.

대상을 수상한 그는 한국장애인국제예술단 정단원은 물론, 디지털 싱글 음반 발매의 특혜를 받았다.

 

첫 번째 도전에서 큰 성과를 얻자 김형회는 도전에 매력을 느꼈다.

그래서 장애인체육에도 도전했다. 부산에서 열린 장애인 펜싱대회도 나갔다.

 

그리고 장애 인식개선 교육강사 자격증도 취득하였다. 그는 공연을 접목시킨 교육을 할 수 있다는 큰 장점이 있다.

한국장애인고용공단에서 취업 캠페인 영상을 만드는데 김형회가 뽑혀서 촬영을 하기도 했다.


“제가 대중매체에 나와 이야기를 하는 모습만 봐도 사람들에게 인식개선을 시킬 수 있을 것 같아요.

무엇보다 장애인예술을 많이 알리는데 일조하고 싶습니다.”

 

 

달라진 것은 없다

 

 


동남대 보건학과에 입학하자마자 만난 여자 친구가 지금은 아내가 되었다.

사고 순간에도 그녀가 김형회 곁에 있었다.

장애인이 된 뒤에도 떠나지 않고 그의 곁을 지켜 준 여자 친구와 2019년 10월에 결혼했다.

어디 그뿐인가, 36개월 된 아들이 있어 집안이 북적북적하고 웃음 소리가 끊이지 않는다.

 

부모님과 누나도 김형회의 든든한 지지자이다.

2024년까지 치기공사로 일을 했으니까 장애때문에 못하게 된 것은 없다.

달라진 것이 없는 것이다.

 

대학 시절 밴드의 싱어를 했었듯이 지금도 노래를 하고 있다.

경수마비는 폐활량이 적기에 노래부르는 것이 쉽지 않지만 열심히 연습하면 무대에서 열창할 수 있다.

지금은 오히려 장애 인식개선 강사로 활동하니 일이 더욱 많아지고 다양해졌다.

 

“가수로 무대에 서는 것보다 강의가 훨씬 많죠.

강의는 올해 예약된 것만 해도 아주 많아요.

초중고등학교 장애 인식개선 교육으로 강의를 하는데 전국에서 저한테 의뢰를 하세요.

학생들이 계속 생기니까 강의는 지속적으로 할 수 있을 것 같아요. 정말 고마운 일이죠.”

 


장애인으로 사는 세상에 장애물이 너무 많기는 하다.

 

장애인 콜택시를 불렀다가 불규칙한 배차 때문에 뙤약볕 아래 3시간 가까이 기다린 일,

비켜줘야 한다는 생각 때문인지 지하철 휠체어 전용 공간에서 승객들에게 외면당한 일,

저상버스를 앞에 두고도 장비 고장 때문에 타지 못했던 일…

 

긍정적인 인생관을 방해하는 장벽이 곳곳에 있다.


한때는 ‘젊은 사람이 딱하네.’라는 행인들 말에 기분이 언짢았지만,

돌이켜 보면 장애인으로 살면서 누군가에게 도움을 부탁하였을 때

단 한 명도 거절한 적이 없었던 점을 본다면 사회의 다양한 장벽들은 곧 허물어질 거라는 확신을 가지게 되었다.

 

그래서 이제는 ‘괜찮아요!’라고 웃으며 답한다.

휠체어 탄 장애인을 보면 모르는 분이어도 먼저 밝게 인사한다.


김형회는 이렇게 온몸으로 장애인 문제에 부딪히며 우리 사회 장애인 그리고 장애예술인이 어떤 모습으로 살아가야 하는지를 보여주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