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11-29

E美지 38호/피플

컨설턴트 정영석의 매력

 

 

대한민국에서는 정영석, 해외에서는 루이 리차드라고 불리우는 남자가 있다. 그는 뼈가 잘부러지고 변형되기 쉽다는 중증 골형성부전증으로 인한 지체장애를 갖고 있다.

1976년생인 그는 교육열이 높은 가정에서 태어난 덕에 어렸을 때부터 학교를 다니며 다양한 것들을 접하며 성장할 수 있었던 것은 큰 행운이라고 했다.

초등학교가 아닌 ‘국민학교’로 불리우던 시절 발레를 보러 가고 컴퓨터를 배울 수 있었던 사람이 몇 명이나 있었을까.

 

스스로를 별다를 것 없는 학생이라고 여기던 그가 말 그대로 ‘자고 일어나니 유명해 졌더라.’ 는 변화를 겪었던 것은 대학 수능을 마치고 입시 결과가 발표된 어느 날 아침이었다.

어느 대학 수석 합격이라는 보도와 함께 인터뷰 요청을 비롯한 갑작스러운 관심이 쏟아졌지만 평소 호감을 갖고 있던 연세대학교로의 진학을 생각하고 있던 터라

수석 입학생으로의 모든 인터뷰를 사양하느라고 진땀을 뺐다.

 

장애인들은 보통 성적에 따라 법학과나 사회복지학과를 선택하는 경향이 있었지만 그는 사회학을 택했다.

관심있던 신문방송학과 심리학을 놓고 고민하다가 두 가지 학문을 다 품을 수 있는 것이 사회학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는 연세대학교에서 유명한 학생이었다.

입학 후 우리나라 대학 최초로 장애인권동아리를 만들어 학교와 사회의 변화를 위해 앞장섰다.

1990년대 중반은 장애인 당사자들이 권리 보장을 위해 목소리를 높이던 시절이었다.

미성년자인 대학 새내기가 직접 찾아온 적은 처음인 것 같다는 장애우권익문제연구소를 돕기 위해 국회를 함께 드나들며 장애인 교육권과 이동권을 위한 법이 제정되는 데 힘을 보탰다.

 

“저는요, 대학에 와서야 장애인은 의무교육에 포함되지 않는다는 것을 알았어요. 제 부모님이 원하지 않으면 저는 학교를 다니지 않아도 됐던 거죠.”

 

MBA 과정 중 마지막 필수 코스인 기업 인턴십 과정을 당시 장애우권익문제연구소 사람들이 주축이 된 장애인차별금지법제정추진연대 사무실 출근으로 대체하기도 했다.

 

 

아직도 알아야 될 것, 알고 싶은 것이 줄지 않아서 고민

 

 

미국, 호주, 프랑스에서 학교를 다닌 적이 있고, 다른 전공으로 몇 개의 과정을 마쳤다는 그를 보면, 세상에서 공부가 제일 쉬웠다는 사람이 여기 있었구나 싶다.

연세대학교 행정대학원에서 공공정책으로 석사(MPA)를 받았고, 서울과학종합대학원대학교(aSSIST)에서는 경영학 석사(MBA)를 받았다.

프랑스 그랑제꼴 EDHEC에서는 교환 과정을, 호주 시드니대에서는 기업 단기 과정도 밟았고, 영국 옥스퍼드와 중국 베이징대 등에서도 강의를 들었다.

 

“뭔가 학문에 뜻을 두고 계속 공부를 해 가는 사람은 아니예요. 대학 졸업 전 선배들과 IT와 사회공헌을 중심으로 컨설팅과 에이전시 사업을 하는 벤처를 시작하게 됐습니다.

일하는 영역 특성상 정부 정책에 흥미가 생겼고, 경영을 좀 제대로 배워야 할 필요도 있었죠.”

 

연세대학교 대학원에서 행정학으로 박사과정(Ph.D ABD)까지 마친 그는 처음부터 박사 학위 받아 학교나 연구소 등에 자리를 잡는 식의 취업에는 생각이 없었다.

 

“공부 어렵죠. 교수님들 본인이 세계 최고이거나 세계 최고들에게 배운 분들이예요. 그런 분들에게 배울 수 있다는 건, 진짜 흥미로운 것도 많고, 행운이죠.

가르쳐 주시는 만큼 제대로 배웠을까, 배운 걸 또 어디에 어떻게 계속 잘 쓸까, 그게 고민이구요. 아직도 알아야 될 것, 알고 싶은 것이 줄지 않아서 고민이네요.”

 

 

다양한 경력

 

 

강의 자료 등의 자기 소개에는 Lecturer(강사), Consultant(컨설턴트), Investor(투자자), Adventurer(모험가)라고 써 있다.

첫 석사 학위를 받자마자 선배들의 요청으로 대학 강사 생활을 했다는 그는 한국예술종합학교와 동국대학교 등에서 예술경영과 문화기획 등을 10년 이상 가르쳤다.

학생들과 밥 먹고 같이 놀러다니며 강사비로 받는 돈보다 지출이 더 컸던 것 같다는 그는 가장 의미 있는 일이라는 뜻에서 본인 타이틀에 강사를 본업이라는 컨설턴트보다 앞에 놓는다.

 

“훌륭한 제자님들이 곳곳에 꽤 있습니다. 컨설팅이나 자문회의를 하러 가서도 만나고, 공연장이나 전시장에서 기획자, 도슨트, 어셔 등등으로 제자들과 부딪치는 일들은 너무 잦죠.”

 

그는 자신을 ‘문화기획자’라 하는 데는 항상 조심스럽다고 한다.

 

“저는 작품이 어떻게 잘 만들어지고, 사람들이 좋은 작품을 제대로 잘 읽어 내게 하는 데 관심이 있는 편입니다.”

 

투자자와 모험가라는 것도 그런 관점이라고 한다.

그는 여전히 후배, 제자, 지인의 전시나 공연을 비롯한 일들이 있으면 어디든 사비를 들여 따라나서거나 찾아가 보는데 주저함이 없다.

 

“굉장히 좋은 핑계고 계기잖아요. 그런 기회가 아니라면 언제 그런 도쿄나 교토의 크고 작은 전시장, 그 슬로베니아 류블라냐의 공연장을 가 보겠어요.

그런 곳에 가서 작업자들에게 사주는 한 끼 밥과 와인 한 잔은 여기서 사 주는 거랑은 달라요.

한국에서부터 이렇게 찾아와 주는 팬, 지지자가 있구나 하는 고마움과 신뢰가 쌓이는 일이죠.”

 

그는 자의든 타의든 열심히 비행기를 타고 떠나서 새로운 환경과 부딪히며 많은 사람들을 만난다.

 

 

장애인예술과의 인연과 조언

 

 

오랫동안 객원 연구원으로 함께하던 메타기획컨설팅을 통해 장애인예술과의 깊은 인연이 시작되었다.

영국문화원과의 교류프로젝트로 한국장애인문화예술원에서 의뢰받은 연구를 비롯하여 모두예술극장, 모두미술공간 개관을 위한 준비 작업과 기획 운영 등에 참여하고 있다.

본인이 장애당사자이고 문화예술경영 전문가이기에 장애인예술이 잘 발전할 수 있도록 작더라도 시간과 관심을 쏟는 것이 주어진 책임이라고 생각한다.

흔히들 장애인예술을 논할 때 선진 외국과 비교하려고 하는데, 그는 이제 단순 비교는 의미가 없다고 말한다.

단순히 해외와의 수준을 비교하는 것이 적절한가에 의문을 갖고 있으며, 발전 가능성에 대해서는 우리의 상황이 나쁘지 않다고 본다.

우리나라의 문화정책은 미국의 문화정책도 아니고 그렇다고 영국과 프랑스의 문화정책도 아닌 그 중간 정도에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문화정책을 실행하기 위해 정부의 공적 자금이 필요한 것은 현실이지만 민간 자본이 들어와야 경쟁력이 생긴다.

장애예술인들에게 꼭 필요한 것이 생활 안정이냐, 예술 활동 기회냐를 논하는 단계는 넘어서야 한다.

활동할 수 있는 기회가 많아지면 생활도 안정이 된다.

현재 주요 쟁점 중 하나는 고용과 고용 형태다.

우리나라 기업은 제도적으로 장애인고용을 하면서 표준사업장 형태를 선호한다.

오케스트라도 표준사업장으로 운영을 한다.

장애예술인 고용의 안정성을 위해서는 예술 활동에 집중할 수 있는 기회와 환경이 주어지는 것이 중요하다.

냉정하게 말하면 기업은 장애인을 고용하지 않아서 발생하는 고용부담금보다 적은 비용을 쓰면서 특히 재택근무로 더블카운트제도가 적용되는 중증장애인을 고용한다면

외부적으로 이미지는 좋아지면서 기업은 월급만 주면 아무것도 안 해도 되는 구조이다.

하지만 자폐스펙트럼을 비롯한 재가 중증장애인에게 필요한 것은 주기적으로 밖으로 나와서 움직이는 사회 활동이다.

예술인복지재단의 태동부터 지켜본 그는 예술인, 장애인이라고 어떤 특별한 다른 제도를 도입하는 것이 아닌 보편적 사회제도 속에서 자연스럽게 작동해야 한다는 이상과

장애예술인에게 당장 필요한 욕구라는 현실 사이에서 이해관계자들의 고민과 실험들이 더해져야 한다고 진단한다.

 

 

(영혼은 몰라도) 진심을 담고 싶은 컨설턴트

 

“세계적인 컨설팅 회사가 대기업에 가서 엄청난 돈을 받고 컨설팅을 해요. 그런데 아무런 변화가 일어나지 않아요. 그러면 그 글로벌 컨설팅사는 이렇게 얘기합니다. 

‘애들이 우리 얘기를 못 알아듣는 것 같애. 기껏 알려줘도 얘들이 시키는 대로 안 해.’라고 하죠.

컨설팅을 받은 회사들은 또 이렇게 말해요. ‘애들이 비상식적이고 비현실적이야.’라구요.

둘 다 맞는 얘기죠. 그리고 갈수록 배워 가는 게 있습니다. 공감 능력도 분명한 하나의 실력이라는 사실을 깨닫고 있습니다.”

 

컨설팅을 받는 조직은 이상론이 아니라 현실론적 접근을 원한다.

당장 생긴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마법 같은 방법을 내놓으라는 건데 사실 그런 방법은 대부분 없다. 꾸준히 방법을 찾아가는 것이지 한꺼번에 해결되지 않는다.

장애인계 컨설팅은 더욱 어렵다. 장애 유형별, 장르별로 각각 다른 욕구를 갖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장애인계는 맞춤형 컨설팅이 요구된다.

요즘은 장애인복지나 장애인고용 쪽에서도 컨설팅 요청을 해 오기 때문에 장애인 문제에 대해 많은 고민을 하고 있다.

 

“세계 최고의 장애인대학이라는 농인 중심 미국 갈루뎃(Gallaudet)대학 견학도 다녀왔는데요.

건축적인 부분은 지체장애인이나 시각장애인에게 중요하고 청각장애인에 대해서는 간과되기 쉽잖아요. 근데 가서 보니까 농인을 고려한 건축적 요소들도 꽤 많더라고요.

얼마 전에도 한창 마무리 공사 중인 서남권 최초 공공미술관에도 자문하러 다녀왔어요. 이것저것 얘기하고 자료들도 정리해서 넘겨주고 있지만 얼마나 반영될지는 모르죠.”

 

그의 명함에는 우리나라에서 제일 크다는 PR회사 시니어 컨설턴트라고 찍혀 있다.

 

 

장애인예술을 위하여

 

 

정영석은 장애인예술에 대한 애정을 숨기지 않았다.

 

“장문원 공모사업에 선정되지 못한 단체나 개인들은 심사위원들이 장애인예술에 대해 잘 모른다는 불만을 갖고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어요. 장애인예술 전문가의 참여가 필요하죠. 

특히 장애인 당사자들의 참여가 중요해요. 저는 제가 장애인예술 전문가라고 말할 정도인지는 몰라도 의뢰가 오면 가능한 우선 순위에 두고 수락을 합니다. 구색 맞추기일 수도 있지만 괜찮아요.

그래도 제가 들어가서 제가 해야 할 일은 하니까요.”

 

처음 ‘장애예술극장’ 건립에 찬성하는 입장은 아니었지만, 모두예술극장 프로젝트에서 무대뿐만 아니라 연출과 기술의 공간에까지 접근성을 확보해야 한다는 그의 아이디어와 주장으로

우리는 어쩌면 세계 최초일지 모르는 휠체어를 타고도 접근가능한 콘솔을 가진 공연장을 가지게 되었다.

모두예술 극장과 모두미술공간의 ‘모두’ 가 그에게서 나왔다.

 

"장애인예술 일을 하면서부터 저의 화두는, ‘청각장애 영역에서 음악을 비롯한 공연의 창작과 향유, 시각장애 영역에서 미술을 비롯한 작품과 전시의 창작과 향유’입니다.

아직은 실제와 거리가 있는, 제가 가장 경계해야 된다고 항상 얘기하는 ‘대상화의 오류’를 제가 범하고 있는지도 모르겠지만요.”

 

정영석은 장애인에게 보다 나은 사회를 만드는 일에 자신의 배움과 경험을 사용할 수 있는 기회를 소중히 생각한다.

쉽게 갖출 수 없는 많은 학력과 경력을 갖고 있는 정영석은 장애인계의 큰 자산이다.

그는 자신이 운이 좋아서 여기까지 올 수 있었다며 겸손하게 말하지만 그 수많은 경력을 쌓기까지 얼마나 많은 노력을 기울였을까를 생각하면 그가 무척 큰 사람으로 느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