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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애인예술 소식을 정기적으로 전해드립니다.
2025-11-29
E美지 38호/문학
공장노동자에서 시인까지, 박정숙의 오디세이
박정숙은 1960년 인천에서 태어났다.
서울, 강원도, 경상도에서 조금씩 살다가 경기도 문산에서 서울로 와서 여기저기 돌아다니다 40년을 서울 대학로에 살고 있다.
그녀는 고향이 어디냐고 물으면 할 말이 없다. 고향이란 따스하고 아름다운 기억으로 가득하기 마련인데 그런 추억이 있는 곳이 없기 때문이다.
소아마비 소녀에게 닥친 폭풍

박정숙은 아주 어렸을 때 홍역에 걸렸는데 그때 소아마비 바이러스가 침입했다.
시간이 지나 홍역은 나았지만 온몸이 흐느적거렸다. 4세 때까지는 일어서지도 못하였다. 소아마비가 그녀의 두 다리를 마비시켰던 것이다.
어린아이가 홍역과 소아마비와 싸우고 있을 무렵 엄마가 많이 아팠는데 어느 날 외할아버지가 와서 엄마를 데리고 갔다.
그 이후 엄마는 돌아오지 않았다고 나중에 아버지한테 들었을 뿐 엄마에 대해 아는 것이 전혀 없다.
그녀는 엄마 얼굴도 모르고 생사조차도 알지 못한 채 성장했다.
새엄마가 들어오고 동생이 두 명 생겼다. 아버지는 돈이 없어서 항상 미안해했다.
아버지는 첫 자식인 정숙에게 애틋한 마음이 있었는데 정숙이 초등학교를 마치고 중학교에 입학했을때 이런 말씀을 하셨다.
“공부 열심히 하렴. 공부 잘 하면 아버지가 약대에 보내 줄게. 약사가 되면 먹고사는 데는 지장 없다.”
당시 공부 잘 하는 여성 장애인들이 대학에 진학할 때 약대에 많이 간다는 것을 아버지는 알고 있었던 것이다.
그렇게 약사의 꿈을 가슴 속에 담고 있을 때 느닷없이 가족 회의가 열렸다.
집안 어른이신 큰아버지 이하 모든 어른들이 모여 앉아서 장애인은 공부해도 소용 없으니 기술을 익힐 수 있도록 공장에 보내기로 결정하였다.
정숙의 의사는 물어보지도 않고 그렇게 간단히 정숙의 미래를 정해 버린 것이다.
정숙의 편을 들어줄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었다. 가난한 아버지는 말없이 그 결정에 동조했다.
아버지도 딸을 약사로 만들고 싶었을 것이다. 하지만 아버지는 딸의 뒷바라지를 해줄 수 없는 상황이었다.
정숙이 계속 공부를 하겠다고 고집을 부리자 농약을 들고 들어와서 같이 죽자고 했다.
어린 나이였지만 죽음이 무서웠다.
“좋아, 죽을게. 하지만 오늘은 안 죽을래. 내일 죽어!”
살기 위한 야반 도주
그날 밤 옷을 챙겨 작은 가방에 넣고 집을 몰래 빠져나왔다.
정숙은 양하지마비였는데 오른쪽 다리 마비가 심하고 왼쪽 다리는 힘이 약간 있어 오른쪽에 목발 하나를 짚으면 천천히 걸을 수 있었다.
그때 살던 곳이 경기도 문산 외딴집이었는데 과수원이 끝없이 펼쳐져 있었고 낮은 산 하나를 넘어야 서울로 가는 기차를 탈 수 있었다.
아직 10대이고 힘없는 가는 다리는 걸어도 걸어도 제자리였다. 그래도 멈추지 않았다. 아버지가 깨기 전에 서울로 가야 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기차를 타려면 돈이 있어야 해서 기차삯을 얻기 위해 시내에서 장사를 하고 있는 친척집으로 갔다.
그곳에서 500원을 얻어 들고 서울로 가는 기차에 몸을 실었다.
당시 정숙은 라디오를 많이 들었는데 무작정 상경하여 온갖 고생 끝에 성공했다는 사연들이 소개되어 그녀도 서울로 가기로 결심했을 뿐
서울 어디로 가야 할지도 몰랐다. 그래서 서울역에 내려 눈에 바로 띄는 파출소로 들어갔다.
학교에서 배우기를, 위험에 처했을 때 파출소에 가면 안전하며 잘 도와준다고 했기 때문이다.
어린 정숙이 기술을 배울 곳으로 데려다 달라고 하자 경찰 아저씨들은 집이 어디냐고 물으며 집에 데려다주겠다고 했다.
“저, 집이 없어요. 부모도 없다니까요.”
당시는 전화도 신분증도 없고, 지문으로 가족을 찾던 시기도 아니어서 정숙은 부녀보호소로 보내졌다.
경찰은 그곳에서 열흘 정도 있으면서 가족들이 찾아오기를 기다리는 듯했지만 아버지는 다행히 실종신고를 하지 않으셨기에
그녀는 무사히 무연고자가 되어 기독교 단체에서 운영하는 은혜원으로 보내졌다.
그녀는 그곳에서 양재학원에 다니면서 양재 기술을 배웠다. 1년 반 동안 재단과 미싱 기술을 배운 후 직장 생활을 시작했다.
공장 노동자 시절의 자존감 지키기

양재학원을 나오면 의상실에서 일하게 될 줄 알았는데 그녀는 봉제공장으로 갔다. 20년 동안 공장을 전전하며 공장 노동자로 일을 했다.
물론 사이사이 작은 의상실에 있다가 패션회사에도 가 보고 쫒겨나면 전자부품을 조립하는 공장도 다니면서 쉬지 않고 일을 했다.
장애인이다 보니까 정당한 대우를 받지 못할 때가 많았는데 그럴 땐 싸우며 투쟁했다.
무시를 당하지 않기 위해서는 배워야 한다는 생각에 정숙은 교회에서 운영하는 야학에 다니며 공부를 했다.
배우면서 꿈을 갖게 되었다. 방송통신대학교 국문학과에 들어가겠다는 목표를 세우고 열심히 공부하면서 자존감을 키워갔다.
결혼과 검정고시로 인생 역전

같은 공장에서 일하던 남자가 정숙에게 사랑을 고백했을 때 그녀는 그 사랑을 거부하지 못하고 결혼을 했다.
결혼 후 집에서 미싱 일을 했다. 남편이 작은 공장을 운영할 때는 공장에 가서 같이 일을 했다.
그러면서 아이 둘을 낳아 어느덧 정숙에게 가족이 있는 따스한 가정이 생겼다.
그즈음 그녀는 공연 엔터테인먼트 회사에서 회원과 홈페이지를 관리하며 공연 줄거리를 작성하고, 공연 리뷰 등을 정리해서 올리는 일을 했다.
미싱을 돌리는 대신 컴퓨터 앞에서 문건을 작성하는 일을 하면서 자기 생각을 틈틈이 짧은 글로 쓰게 되었다. 바로 시(詩)였다.
시에 대해 알고 싶어서 시인 모임에도 나갔는데 시 동인들의 첫 질문이 ‘어느 대학 나왔느냐?’, ‘국문학을 전공했느냐?’였다.
정숙이 ‘학교 안 다녔는데요.’라고 대답하면 슬그머니 시선을 돌리면서 더 이상 말을 걸지 않았다.
시를 쓰는 데도 학력의 벽이 있었다.
육아로 잠시 접어 두었던 공부에 대한 열망이 다시 솟구쳐 올랐다.
야학을 찾다가 장애인 야학이 있다는 것을 알았다.
출산 후 몸무게가 늘어나서 계단을 오르내리는 일이 힘들었는데 2013년에 찾아간 ‘노들장애인야학’은 정숙의 이동의 어려움을 말끔히 해결해 주는 천국이었다.
그녀는 그곳에서 공부를 하며 초, 중, 고등학교과정 검정고시를 1년 안에 모두 패스하는 뛰어난 실력을 발휘했다.
물론 초등학교는 졸업했지만 재학증명서가 필요했기 때문에 시험을 봤던 것이다.
그때가 박정숙 나이 58세였다. 그녀는 밤늦게까지 족집게 과외처럼 검정고시를 도와준 야학 교사들의 덕이라고 고마워하였다.
고등학교 졸업 자격을 취득하고 사이버대학교 기독교상담복지학과에 입학을 하였지만 일과 병행하기가 힘들어서 학업을 마치지 못하였다.
대학로에서 시작한 새로운 인생
정숙은 그때부터 대학로에 살고 있다. 노들야학이 대학로에 있기 때문이다.
그녀는 현재 (사)노란들판에서 장애인활동지원서비스제도에 따른 활동지원사 교육을 담당하고 있다.
박경석이란 걸출한 장애인계 지도자 덕분에 그녀는 장애인 인권운동 활동가가 되었다.
모든 장애인이 투쟁가가 될 수는 없지만 장애인에 대한 차별을 뼛속 깊이 느끼며 성장한 정숙으로서는 외면할 수 없는 일이다.
남편은 정숙을 위해 서울에서 인천으로 20년 동안 출퇴근을 하고 있다. 그는 교복을 만드는 회사에서 일을 한다.
정숙보다 한 살 어리지만 그래도 60대 중반인데도 일을 하고 있어 얼마나 고마운지 모른다.
딸은 결혼을 했고, 네 살 아래 아들은 공부를 하고 있다.
부부가 열심히 일을 하는데도 아직 전셋집에 산다. 하지만 그녀는 불만이 없다.
아이 둘을 키웠고, 지금까지 할 일이 있다는 것이 그저 고맙다.
더군다나 시집「통증일기」를 출간하여 사람들이 자기를 시인이라고 불러주어 자존감이 상승하고 있다.
박정숙 그녀는,
장애인은 가족과 사회에 폐만 끼치는 쓸모 없는 잉여인간이 아니라
가정을 꾸리고 열심히 활동을 하는 생산적인 사람이라는 것을 증명해준 우리 시대의 소박한 영웅이다.
박정숙은 시인이다

박정숙은 2025년 7월,「통증일기」라는 시집을 발간했다.
많은 분들이 추천의 글을 써 주었고, 동의대 교수 윤지영 시인은 ‘몸의 언어로 다시 쓰는 감각의 배치’라는 해설을 썼다.
그녀의 시집은 무려 187쪽에 이른다. 시집 한 권에 65년 그녀의 삶을 담았기 때문이다.
장애문인들이 시집을 출간하기 힘든 현실을 박정숙도 고스란히 경험했다.
출판사 여기저기에 원고를 보냈지만 출판사들은 외면했다. 상업성이 없기 때문이다.
사회적 차별을 외치는 시집에 독자들이 관심을 두지 않을 것이라는 고정된 사고에 묶여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녀의 동지들은 시집 출간 프로젝트를 멈추지 않았다.
그래서 드디어 ‘끌레마’라는 출판사를 통해 그녀의 원고가 멋진 시집으로 탄생할 수 있었다.
그녀의 원고를 읽어 본 편집장이 적극적으로 출판을 서둘렀다. 박정숙이란 인물의 삶에 고개가 숙여졌기 때문이다.
시집을 처음부터 끝까지 읽어 본 분들이라면 출판사 편집장의 마음에 공감할 수 있을 것이다.
지면 상 박정숙의 시집「통증일기」에 실린 시 한 편을 소개한다.

시집 마지막에 놓은 <당신에게>라는 시는 박정숙 그녀의 65년 인생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그녀가 얼마나 넓은 가슴을 가진 인간미 넘치는 매력적인 사람인지 잘 나타내준다.
첫 행에서 “살아야겠습니다” 라고 외치며 독자를 긴장시킨다.
분명 꼿꼿이 허리를 세우고 어깨 펴며 살았던 것 같은데 힘겨웠던가 보다며 이제 노년기에 접어든 자신의 모습을 인식한다.
그리곤 이내 “열심히 살았습니다”라고 항변한다.
사랑을 만났고, 그래서 태어난 아이들이 주는 행복에 힘든 줄 모르고 여기까지 왔다고 설명하면서
돈도 명예도 얻지 못했지만 밑지는 장사는 아니라고 자신의 인생을 평한다.
요즘 뉴스는 온통 인생을 망쳐 버린 사람들 소식뿐인데 자기 인생은 밑지는 장사가 아니었다고 당당하게 말하는 그녀가 부러울 사람들이 많을 것이다.
그런 사람들에게 시인은 마지막 연에서 선물을 준다.
“비록 빈 주머니일지라도/주먹을 펴면/그 안에 따스하게 숨어 있는/사랑이 있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