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11-09
누구?!시리즈33
시로 세상을 읽는 시인 허상욱
누구시리즈33
시로 세상을 읽는 시인 허상욱
따뜻한 봉사로 사는 법
시인 허상욱
1971년 경기도 안성에서 태어났다. 서울과 성남에서 살았었고, 현재 대전에 거주하고 있다.
질병과 가난으로 생긴 시력 문제로 계속 시달리다가 1999년 완전히 실명하였다. 실명전 이런저런 사업도 많이 해 보고 실패도 경험하면서 결혼 하여 아들을 두었다. 하지만 앞을 볼 수 없게 된 후에는 시각장애인으로 살아갈 준비를 하기 위해 2000년 검정고시로 중학교 졸업 학력을 갖추고 2001년 대전맹학교에 입학하였다. 졸업 후 안마업을 하며 열심히 살고 있다.
2010년 이혼 후 글을 쓰고 싶다는 욕구가 생겨서 배재대학교 평생교육원에서 시를 공부했다. 이런저런 문학공모전에서 수상을 하다가 드디어 2023년 구상솟대문학상을 수상하였다. 어느덧 꾸준히 작품집을 발간하고 있는 중견 시인이다.
2017년부터 현재까지 대전점자도서관 시 문예창작반 강사로 활동하고 있으며 대전 소재 ‘시인안마원’ 대표로 일하고 있다.
bungetan21@naver.com
여는 글
나는 개천에서 난 용이다
나는 아홉수의 시각장애인이다. 아홉 살에는 홍역으로 저시력자가 되었고, 열아홉에는 결핵과 폐렴으로 좋았던 눈을 먼저 실명했 고, 스물아홉에는 수술 실패로 나머지 눈마저 잃고 기어이 완전(完 全)해졌다.
아홉은 자기 고요의 시간을 의미하며, 열아홉은 상하좌우가 나누어지는 순간들을 각각 다른 시력으로 발견하는 체험의 시간이었 으며, 스물아홉은 세상 모든 사물들이 시간과 공간의 혼합이 투명 하고도 완벽한 소용돌이를 일으키는 순간이었다고 말할 수 있는 데, 이러한 명제들은 나의 아홉을 좀 더 세밀히 사색하는 시절로 만들었고, 열아홉은 나를 나로서 존재하게 하는 기회의 시간들을 나열하게 하였으며, 스물아홉은 가능한 현실을 지각하여 미력한 육신을 탈각(脫却)한 것으로 먼저 나만의 완성한 시력을 이루어 낸 것이라 볼 수 있다.
오늘 아침에 막 출근하여 호세 펠리치아노(Jose Feliciano)의 를 들었다. 개구진 육성에서 흘러나오는 슬픈 이 곡조는 내 대뇌피질의 주름을 하나씩 지우기 시작했다. 갑자기 마른하늘에 겨울비가 내렸다. 지금껏 환했던 햇살이 오늘은 우중충하고도 끈끈한 빗줄기로 화하였다. ‘내일이라는 계절이 찾아오면 연둣빛 싹들이 초록의 계절로 옮겨 갈 것이다.’와 같은 희망의 문구를 나는 또 아무렇지 않게 쓰고 말 것이다.
고로 그 호세 펠리치아노의 슬픈 리듬은 그동안 호메로스와 존밀턴과 헬렌켈러가 연산해 놓은 긍정의 희망적 고문을 단숨에 빠개 버리고 나를 다시금 그 참혹하도록 아름다운 심연으로 끌고 들어가는 것이다. 그러면서 또 한 편의 희극도 아닌 비극도 아닌 이상한 대본을 내 눈앞에 펼쳐 놓는다. 그 가운데 멀뚱히 선 나그네로 나를 끌어당겨 세운다. 그리하여 나는 또 한 편의 시 아닌 시를 짓무른 눈가를 찍으며 완성할 수밖에 없다.
과연 개천에서 용이 날 수 있을까? 하지만 여러분들은 지금 개천 에서 난 용의 글을 읽고 있다. 버스에서 거지 행색으로 신문을 팔던 아이가 시인이 되어 있는 그 시인의 글을 읽고 있는 것이니 말이다.
강희안 교수님이 나에게 작위처럼 내려 주신 따뜻한 봉사로 사는 것이 나의 인생 목표이다. 여기서 봉사는 봉사 활동이 아니라 시각 장애인을 뜻한다. 봉사가 장애인 비하 용어라고 말하지만 나는 봉사를 나의 당당한 정체성이라고 생각하기에 따뜻한 봉사가 나의 캐릭터이다. ‘나 이제 봉사로 살아가리라’라는 문장을 거듭 강조하고 있다. 이제야 비로소 따듯한 마음으로 누군가를 위해 봉사 활동하며 살아가고 싶은 것이다.
2024년 여름 대전 갈마동에서 시인 허상욱
차례
여는 글―나는 개천에서 난 용이다 12
검정 고무신 17
외딴집엔 전깃불도 들어오지 않았다 21
코끼리한테는 수박도 한입거리 25
100원짜리 환희 36
이런 남자와는 결혼하지 마라 43
미친 봉사 46
나 이제 봉사로 살아가리라 49
맹학교에 입학하다 59
노란 하늘 64
아픈 이별 69
인간답게 살기 위해 72
소중한 인연 79
2023구상솟대문학상 주인공이 되다 84
시인 만들기 102
따뜻한 봉사로 사는 법 106
시(詩)라는 깊은 수렁으로 넘쳐나는 봇물 앞에서 매일 허물어지는 사내가 있습니다.
잠들 때나 깨어 있을 때나 기억의 파편들을 주워 모을 때나 사랑하는 사람을 그리워할 때조차 시의 저울에 올려놓고, 자신의 생을 기우뚱기우뚱 먼저 뛰어내릴 수 없는 시로 밥을 먹고 시가 깔아 준 이불을 펴고 누워 있으면서 하나의 조사를 삭제하지 못하고 진종일 곱씹다가 결국 꿀꺽 삼켜 버리고 캄캄한 밤의 대양을 삿대 하나로 저어 가는 한마디로 말해서 거기에 완전히 미쳐버린 사람입니다.
까마득 높은 하늘의 별들이라고 생각한 것들에 좀 더 다가가기 위해 옥상 위에라도 올라가거나 이미 빛이 사라진 눈을 자꾸 비벼 짓무르게 하거나 한껏 충혈되게 할 때만 자신의 시가 시로 읽혀질 수 있다고 믿는 사람이 있습니다.
알아주는 사람 하나 없다고 자신조차도 경멸할 수밖에 없다고 생각하던 것을 한 줄의 시구로 살려 내려는 이 결연한 의지는 쉽게 망각되어서는 안 될 일입니다.
희붐하도록(날이 새려고 빛이 희미하게 감돌아 밝은 듯하다) 그려 놓은 나의 이야기를 음미하며 당신이 겪게 될 울적한 경험은 자아실현(自我實現)의 목적으로부터 온전히 탈각(脫殼)한 존재감이 감지되었다든가 그 까마득한 심경의 한가운데로 당신 스스로 입수(入水)한 일에서 시작된 것입니다.
냉동 또는 냉장의 형태를 벗어난 기억들을 탁자에 펼쳐 놓고 무언가 곱씹어 보려는 나의 이번 자전 에세이 글쓰기가 자꾸 기름칠을 해 줘야만 돌아가는 낡은 미싱의 페달을 밟는다거나 무릎 관절의 아픔을 자꾸 더듬어 본다던가, 저만치 불켜진 가로등을 향해 걸어가다가 발목을 수렁에 빠뜨리고 마는 그 암흑의 바다 한가운데로 걸음을 재촉한다던가, 온갖 수식의 난간을 들이받으며 범속(凡俗)하고 평범한 상식 속에서 나의 나열된 문구에는 꽃을 피우는 일을 지속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단순 봉사(奉事)에서 따뜻한 봉사(奉仕)로 전환되는 내가 달빛조차 힘겨운 새벽에 깨어나면 시린 늑골 안쪽으로 새겨지고 마는 문자의 홍수를 그 어딘가로 떠내려가지 않을 수 없다고 말합니다.
시인으로 하루를 살아 낸다는 것은 이미 그 범람하는 파도 속으로 스스로의 육신을 얹어 놓았기 때문입니다.
내가 제시해 놓고 그 안에서 사유하는 모든 것들을 만나야 하고 그들과 사랑을 하거나, 그들을 어루만지거나, 한 이불 속에서 가장 은밀한 대화를 속삭이거나, 함께 울고 또 웃는, 이러한 방식으로 시의 까마득한 지평을 다독이고 싶은 이유는 나는 아직도 따뜻한 피가 흐르고 있기 때문입니다.
-본문, '따뜻한 봉사로 사는 법' 중에서
허상욱
배재대학교 평생교육원 시문예창작반 수강(2013)
대전점자도서관 시문예창작반 강사 시작(2017~ )
2023 구상솟대문학상
2022 대구문인협회 문학상
2021 부산점자도서관 시‧수필 공모 대상
2021 대전문화재단 창작지원금 수혜
2020 한국장애인문화예술원 창작지원금 수혜
2020, 2013 ‘호메로스의 노래’ 시 부문 대상
2024 시집 「힘겹게 좀 더 느리게」 출간 예정, 장편소설 「무인도」 집필 중
2024 에세이 「60번 죽은 남자」
2023 김병익 시인 제5시집 「물메기 와불」 평설 집필
2023 월간 『나라경제』 이달의 초대 시인 추대
2021 시집 「너 내가 시집 보내줄게」
2020 시집 「시력이 좋아지다」
2017 시집 「달팽이의 집」
2015 시집 「니가 그리운 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