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4-04

김율도 소설

바퀴춤

 

 

글_김율도, 그림_송지원

 

 

 

 

바퀴춤

 

김율도 장편소설 <바퀴춤>은 서울문화재단에서 실시하는 2023 <장애예술인 창작활성화 지원사업> 선정작으로  발간되었다. 

 


바람을 가르고 바라보면 바라볼수록
퀴즈처럼 풀면 풀수록 신비로운
춤, 휠체어댄스 그대

 

 

김율도

1988년 서울신문 신춘문예 시조 당선
1991년 서울예술대학교 광고창작과 졸업
1991년 제1회 대한민국장애인문학상 대상
2014년 구상솟대문학상 대상
2022년 대한민국장애인문화예술대상 문화체육관광부장관상

장편소설 <시인, 조폭>

장편동화 <큰 나무가 된 지팡이>, <아빠는 슈퍼로봇>

시집 <다락방으로 떠난 소풍>, <그대에게 가는 의미>

교재 <세상을 뒤집는 스토리텔링>

 

 

이 책을 쓴 이유 

나는 5년동안 휠체어 댄스를 했다. 
휠체어댄스를 하기 전까지는 지루하고 답답하고 살아가는  의미를 찾을 수 없었다. 
가도가도 길고 어두운 터널이 끝날 것 같지 않았다. 하루하루 똑같은 일상에 무엇을 해 봐도 보람이 없었고 자유가 없는 신체에 불만도 점점 높아갔다.  
휠체어댄스라는 새로운 세계로 들어서자 지루했던 삶이 활기가 생겼고 가슴 떨림도 맛보았다. 
왜 진작 그 생각을 못했을까.
세 살 때 소아마비에 걸려 한쪽 다리를 심하게 절며 학창시절과 중년까지 살아왔지만 그나마 걸어다닐 수 있었기에 휠체어를 타지 않아 휠체어댄스를 접할 기회가 없었나 보다. 
그러다가 문득, 시인이자 영화평론가의 탱고 춤을 보고나서 “아, 저거다!” 나도 해보고 싶었다. 
그런데 서서는 할 수 없으니 자연스럽게 휠체어댄스가 떠올랐고 우연히 TV에서 보고나서 매력적으로 생각되어 결정하게 되었다.
이 소설은 그 때의 체험을 바탕으로 쓴 글이다. 그래서 댄스 용어, 장애인댄스의 세계 등을 아주 구체적이고 실감나게 그릴 수 있었다.

이 소설을 쓴 이유는 비장애인에게는 장애관련 소재가 특수한 소재가 아니고 보편적인 소재로 인식시켜 장애를 바라볼 때 어떤 틀을 통해 바라보는 시선에 경종을 울리고자 한다.
인생은 가변적인데 자기 의지와 상관없이 바뀌는 운명을 대하는 자세를, 다양한 캐릭터를 통해 독자 스스로 깨닫고 행복과 불행에 대한 고정관념을 깼으면 좋겠다. 

 

 

작품 줄거리

몽도, 지니, 루비. 청소년 3명이 춤으로 만나 벌어지는 사랑과 갈등 이야기.
교통사고로 다리를 다친 16살 몽도는 엄마의  추천으로 큰 기대없이 휠체어댄스를 시작하게 된다.
몽도의 첫 댄스파트너 루비는 강하게 독려하지만 몽도는 강압적이라 그만두고 싶어한다. 다행히 전국대회 첫 출전에서 금메달을 따지만 몽도는 즐거움을 느끼지 못한다
두 번째 파트너 지니는 친절하고 착하지만 가르치려는 자세로 지적만 하여 숨이 막힌다. 
몽도는 지니와 행글라이더를 타다가 사고로 둘은 추락한다. 땅에 떨어질 때 지니 밑으로 몽도가 일부러 깔려 몽도는 하반신을 완전히 쓸 수 없게 되고 오직 휠체어만 타야 한다. 
무사한 지니는 몽도를 헌신적으로 간호하며 사랑을 키운다. 

 

 

차례

1. 처음 본 바퀴춤

2. 첫 경험은 왜 두근거릴까?

3. 첫 시합에 금메달

4. 새로운 파트너 지니

5. 나도 언젠가는 저런 창작 무용을

6. 그냥 땀을 닦아주고 싶었다

7. 그리움은 신의 명령

8. 파트너를 바꾸라고

9. 구름 타고 가는 기분

10. 루비와 타이타닉을

11. 이제부터 반말할 거야

12. 나도 빨래 잘 널어

13. 지니 밑으로 깔리고 싶다

14. 네 옆에 있으니 잠이 잘 와

15. 한국의 라라공원

16. 일반인 댄스파티에 휠체어

17. 모두의 천사가 되려는 거야?

18. 사는 것은 시소 같아서

19. 몸으로 시 쓰기

 

 

1. 처음 본 바퀴춤

 

 

“왜 악~ 악 거려. 악몽 꿨니?”

 

해골 얼굴이 어느새 엄마 얼굴로 변했다. 아 깜짝이야.

 

“무슨 꿈 꿨길래? 와 저것 봐. 멋있지 않니?”

 

꿈 내용도 듣지 않고 엄마는 나의 식은땀을 닦아주며 말했다. 
뉴스에서 휠체어를 타고 춤을 추는 장면이 나오고 있었다. 나는 떠지지 않는 눈을 비비고 보았다. 한국이 아시안 게임 댄스스포츠 종목에서 3관왕을 했다는 소식이었다. 

 

“신기하다. 어떻게 저렇게 춤을 추지?”

 

엄마는 과장되게 연기하는 신인 연기자처럼 말했다.

 

“뭐가 신기해. 휠체어에 앉아서 추면 돼지.”

 

TV속에서는 조명이 번쩍이는 무대에서 휠체어와 서서 추는 여자 댄서가 절묘하게 조화를 이루며 춤을 추고 있었다.
화면이 바뀌고 남자는 연미복을 입고 휠체어에 앉아 손을 흔들었고 여자 역시 휠체어에서 드레스를 입고 환하게 웃고 있는 장면이 눈에 들어왔다.

 

“한국의 초강세가 이어진 휠체어 댄스스포츠도 3관왕을 배출했습니다. 듀오 라틴 클래스2에 출전한 이희진-김방수 커플은 삼바, 차차차, 룸바, 파소도블레, 자이브 등 5개 종목에서 모조리 1위를 휩쓸며 압도적인 금메달을 차지했습니다.”

 

뉴스 멘트의 배경 화면에 등장하는 그들은 금메달을 입으로 깨물며 승리의 포즈를 취하고 있었다. 

 

 

2. 첫 경험은 왜 두근거릴까?

 

 

전화로 상담한 후, 지팡이를 짚고 처음으로 댄스스포츠를 배우러 가는 날, 개나리가 활짝 피었다. 
간단한 상담을 하고 시작하기로 했다.

 

“댄스를 하려는 목적이 뭐지?”

“춤추는 게 멋있어 보여서요.”

 

휠체어에 앉아 아주 간단한 기본 동작을 배웠다. 앞으로 가기, 제자리에서 돌기, 리듬에 맞추어 간단한 동작 하기.
나와 함께 춤출 파트너는 대학에서 춤 전공을 하고 있고 이미 여러번 전국 대회에서 금메달을 딴 소연이라는 대학생이었다.
다음 주에 갔더니 소연이 은퇴한다는 것이다. 

 
그 후 나는 1달동안 파트너 없이 혼자 연습했다. 1년 이상을 외롭게 혼자 지냈는데 다시 또 혼자 외롭게 연습을 해야하다니. 스탠딩 파트너 구하기는 힘들다는 것을 처음으로 알았다. 
어느 날 처음 보는 여학생을 감독님이 인사를 시켰다.

 

“인사해, 여기는 앞으로 네 파트너가 될 루비야.”

“난 17살 고 1이야. 넌 몇 살이야? 중학생 같긴 한데...”

“난 16살….”

 

나는 거침없는 그녀의 태도가 도전적으로 느껴져 나도 반말로 말했다.

 

“그럼 중3이겠네.”

“사고로 1년 쉬어서 중2야.”

“아 그래. 내가 나이가 많으니까 누나라고 불러.”

 

나는 당황했다는 것을 전달하려고 빤히 그녀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하지만 그녀는 아랑곳하지 않고 계속 말했다.

 

“오늘은 첫날이니까 기본 동작만 배워보자. 먼저 준비 운동은 해야 해. 안 하면 다치니까 꼭 해야 해.”

 

레슨하는 루비 말투가 너무 강압적이고 딱딱해서 이대로 레슨 하다가는 끝나기도 전에 숨 막혀서 사망할 것 같았다.

 

“댄스스포츠는 라틴과 스탠다드로 나뉘는데 라틴 다섯 종목, 스탠다드 다섯 종목이 있어. 오늘은 라틴 중에서 뉴욕이라는 동작을 배워보자. 한쪽 팔을 위로 힘차게 뻗고 손가락을 쫙 펴.”

“왜 이 동작을 뉴욕이라고 하는 거야?”

 

나는 정말 궁금해서 물었다.

 

“그건 몰라. 그냥 해.”

“이 동작이 뉴욕에 있는 자유의 여신상과 같아서 그런 거 아닐까?”

“깔깔깔깔 아, 정말 그러네. 너 천재다.”

 

갑자기 천재가 된 나는 다음 동작으로 루비의 손을 잡고 한 바퀴 도는 동작을 했다. 루비는 작은 손을 내 눈앞에 내밀었는데 너무 작고 흰 손이었다. 거기에 비해 나는 두툼하고 핏줄이 불거진 칙칙한 손이었다.
여자 손은 많이 보았지만 그렇게 예쁜 손은 처음 보았다. 갑자기 가슴이 두근두근 뛰기 시작했다. 그 소리가 루비에게도 들릴 것 같은 느낌이었지만 들리면 어때. 
손을 쳐다보기만 했는데 가슴이 뛰는데 잡으면 어떻게 될까? 터지지 않을까? 나는 조금 주저하자 루비는 다그쳤다.

 

“빨리 잡아.”

“근데 루비, 휠체어댄스를 하게 된 계기는 뭐야?”

“그냥 재미있을 거 같아서...”

“입시에 특기자 점수 주는 건 없어?”

“아, 씨! 몰라. 그런 걸 왜 물어?”

 

갑자기 욕같은 말을 들으니 상쾌하면서도 까칠한 성질이 언제 튀어나올지 몰라 방어를 잘해야겠다는 생각이 불쑥 들었다.

그렇게 한 달을 라틴 기본 동작하다가 갑자기 루비가 말했다.

 

 

“오늘은 폭스트롯을 할 거야.”

 

나는 입을 꽉 다물고 시무룩한 표정을 지었지만, 루비는 신경 쓰지 않고 폭스트롯에 대해 설명했다.

 

“폭스트롯은 4분의 4박자로 여우가 걷는 것처럼 경쾌하고 천천히, 빠르게 반복적으로 하는 거야. 슬로우 퀵, 슬로우 퀵. 알았지?”

“응, 그러니까 여우처럼 트로트를 하는 거네.”

“맞아. 너 천재네.”

 

천재라는 말을 자주 들으니 장난처럼 여겨졌지만 나쁜 말은 아니니 그냥 칭찬이라고 생각하고 기분 좋게 받아들였다.

 

“장애인들은 천재가 많다는데….”

 

어디서 들은 이야기인지 몰라도 고정관념을 고쳐주고 싶어서 말했다.

 

“장애인들이 천재가 많은 게 아니라 천재인데 장애인이라 부각되서 그렇지.”

“그렇다고 그렇게 따지냐?”

“따지는게 아니야, 그냥 잘못 알고 있어서 말한 것 뿐이야.”

 

루비는 더 이상을 말을 잇지 않고 나의 두 손을 잡고 빠르게 연습실을 한 바퀴 돌았다.

어제까지만 해도 이럴 때는 마치 차를 타고 달리는 것 같기도 하고 오토바이나 자전거를 타고 달리는 상쾌한 기분이었는데 지금은 과속운전으로 사고날까 두려운 기분이다. 

 

 

3. 첫 시합에 금메달

 

 

장애인 전국 체전이 하루 앞으로 다가왔다. 
전국 체전 첫 시합의 분위기는 처음 보는 환경이라 모든 것이 낯설었다. 
쿵쿵, 귀가 아닌 심장을 울리는 음악과 천정에서 번쩍이는 조명으로 인해 이상하게 흥분되었다. 
막상 시합이 시작되자 그다지 떨리지 않았다. 메달보다는 그냥 춤 자체를 즐겁게 하겠다고 생각하니 떨리지 않았다. 
대기 중에 루비의 손을 잡았는데 손이 차가웠다. 루비같은 성격이 긴장하다니 시합은 시합인가 보다.

 

“긴장 했어?”
“아이 몰라.”

 

결과 발표를 기다리는데 저쪽에서 우리 팀 선수들이 환호성을 울렸다. 다가가 알아보니 나와 루비가 룸바에서 금메달을 딴 것이다. 처음 출전해서 금메달을 딴 것은 드문 일이라고 했다.
루비는 그래도 한 종목이라도 금메달을 따서 안도하는 느낌이었다. 그녀는 웃는 얼굴을 숨기지 못하고 어린아이처럼 너무 좋아했다.
그제야 루비는 같이 기념사진을 찍자고 했다. 금메달을 따니까 나에게 무척 친절해진 것 같았다.
내 옆에 나란히 서서 지나가는 사람에게 핸드폰을 내밀고는 사진을 찍어달라고 했다. 아마 메달을 따지 않았다면 사진도 안 찍었을 것 같았다. 나는 자연스럽게 루비의 허리에 손을 올렸는데 루비가 슬쩍 내 손을 치웠다.
루비는 자신을 위해서 금메달을 딴 것만은 아닌 것 같았다. 협회에도 누를 끼치지 않아 다행이라 생각하는 것 같았다.
 

 

4. 새로운 파트너 지니

 

 

루비는 대학 입시 준비를 한다고 그만하겠다 했다 한다.

 

“안녕하세요.”
“네, 안녕하세요.”
“아이, 민망해. 난 지니예요.”
“난 몽도예요.”

 

민망하다고 말하는 거 보니 부끄러움을 많이 타는 성격 같았다. 루비와는 정반대로 상냥하고 예의 바르고 부드러웠다.

 

“휠체어댄스는 처음이에요?”

 

나는 왜 매번 이것이 궁금할까?

 

“네 처음이에요.”

 

지니와의 첫 만남은 평범했다. 첫인상은 포근했다. 
지니 나이는 18살이었다. 나도 이제 17살이 되었으니 1살 차이다. 
지니는 누나라고 부르라고 강요하지도 않았고 나도 누나라고 부르지 않았다. 

지니는 부드러웠지만, 은근히 고집이 센 것 같았고 순진한 면도 있었다. 
연습 때 나는 지니의 가슴 쪽을 쳐다본 적이 있었다. 그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휠체어에 앉아있으면 자연스럽게 눈높이가 가슴 쪽에 맞춰지기 때문이다. 
초여름이라 지니는 얇은 옷을 입었고 가슴골이 약간 보이는 옷이었다. 나는 근접된 상황에서 정면으로 가슴에 시선이 고정될 수밖에 없었다. 그렇다고 눈을 감을 수도 없고 고개를 돌리면 더 어색했을 것이다. 보는 시간이 조금 길었나 보다. 지니는 내 시선을 느끼고 자기 가슴을 한 번 쳐다보더니 곧바로 화장실로 달려갔다. 자기 옷이 너무 야하지 않나 점검하러 간 것일까. 
다시 돌아온 지니의 옷은 뒤로 약간 올라가고 가슴골이 많이 가려져 있었다.

 

 

5. 나도 언젠가는 저런 창작 무용을

 

 

6월에 서울에서 열린 지역 대회에서 프리댄스를 처음 보았다.
모두 네 팀이 나와서 했는데 기억에 남는 것은 <거미 여인의 키스>와 <오페라의 유령>이다. 
두 작품 모두 동영상을 찍었다.

<거미 여인의 키스>는 마누엘 푸익이 쓴 소설로 감옥에 있는 발렌틴을 몰리니가 유혹하면서 이야기를 들려주는 내용이다. 


댄스 첫 장면은 상하 검은 복장으로 입은 여자가 멀리 떨어진 상태에서 상대 쪽 휠체어 남자 무용수 쪽으로 살금살금 기어간다. 그리고 몸을 굴려 더 가까이 간다. 일어나서 탐색하듯 주변을 돌며 가까이 접근했다가 다시 떨어지더니 혼자 춤을 추다가 다시 살금살금 걸어간다. 휠체어도 서서히 다가간다. 
음악이 바뀌더니 거미 여인이 휠체어 뒤로 올라간다. 
고개를 좌우로 흔드는 안무를 한 후 거미 여인이 허리를 숙인 남자 휠체어 무용수의 등에 자기의 등을 맞대고 눕는다. 
휠체어는 그 상태에서 제자리에서 3바퀴 돌다가 급격한 음악과 함께 떨어져 서로 멀어진다. 
각자 춤을 추다가 다시 가까이 가서 둘이 조화롭게 춤을 추고 휠체어 바퀴 한쪽을 드는, 난이도가 높은 동작도 보여주고 급격한 움직임이 계속된다. 
마지막은 뉴욕 동작으로 끝을 맺는다.
나도 언젠가는 저런 창작 무용을 해 보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6. 그냥 땀을 닦아주고 싶었다

 

 

지니와 탱고 리듬을 타고 한 바퀴 돌고 나니 지니가 땀을 많이 흘렸다. 휠체어에 앉아서 추는 사람과 발로 뛰는 사람의 체력 소모는 차이가 크게 났다.

지니의 팔은 땀으로 끈적했고 상의 티셔츠 윗부분이 젖었고 얼굴에서 땀이 많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나는 지니의 땀을 닦아주고 싶었다. 왜 그런 생각이 들었는지 설명하기 힘들고 나도 잘 모르는 감정이었다.
그래서 나도 모르게 옆에 있는 티슈를 뽑아 지니의 얼굴로 가까이 대는 순간, 지니가 갑자기 얼굴을 피하며 뒤로 물러났다. 지니도 당황했겠지만 나도 당황하고 민망했다.
순간적으로 나는 행동이 굳었고 지니는 내가 주는 티슈를 받으며 말했다.

 

“내가 직접 닦을게요.”

 

그리고는 티슈를 빼앗듯 가져가서 스스로 얼굴을 닦았다. 나는 조금 뻘쭘하여 어색해졌다. 
나는 너무 무안하고 거절당한 것 같아 가슴을 사포로 문질러 대는 것처럼 쓰라렸다. 
나는 해서는 안 될 못된 행동을 한 것일까? 
화장실에 가서 얼굴을 쳐다보니 얼굴이 발갛게 상기되어 있었고 화가 난 것을 참으려는 나의 모습이 거울로 보였다. 
한참을 그렇게 멍하니 있다가 다시 연습실로 돌아갔다.
무안함을 없애려는 듯 지니가 말했다.

 

“손깍지는 어른들이 사교춤에서 많이 한대요.”
“아이 어른 구분하는 것이 왜 그렇게 많아요?”
“그래도 아직은...”
“나도 몸은 어른이예요.”
“그래도 아직 청소년이잖아요.”


 
그 일이 있고 나서 갑자기 댄스가 재미 없어졌다. 
고정 자세로 팔 벌리고 있는 것이 마치 벌을 서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내가 먼저 추자고 정한 종목인 탱고는 경쾌한 음악에 맞추어 절도 있는 동작으로 추는 춤이다. 
언제가 어떤 영상에서 영화평론가이자 시인이 추는 탱고 춤을 보았는데 그것을 그렇게 추고 싶었다. 
그러나 오늘 연습에서 내가 자꾸 틀렸다. 영화 ‘여인의 향기’에 나오는 음악에 맞춰 익숙한 음악인데도 동작이 틀리는 것이다. 
지니가 부드럽게 웃으며 반복해서 친절하게 알려주었다.
그러나 이상하게 집중이 되지 않고 마음이 붕 뜬 기분으로 동작이 내 마음으로 되지 않았다. 

 

“몽도님, 왜 자꾸 틀려요?”
“잠깐 딴생각 했어요.”
“누구 생각했어요? 집중해 봐요.”

 

-앞에 있는 니 생각을 해서 몽롱해서 자꾸 틀려.- 이렇게 내면의 소리를 억누르느라 계속해서 몇 번 동작이 틀렸다. 

 

 

7. 그리움은 신의 명령

 

 

“몽도님 저 좋아하세요?”

 

지니가 너무 갑자기 물어봐서 오랜만에 당황되었다. 
코치 선생님이 옆에 있는데도 들으라는 듯 이런 질문을 하는 것은 나에 대한 공격인가, 시험인가? 확인인가? 
지니는 무슨 대답을 듣고 싶은 것인가? 
나는 강하게 나가야 한다고 생각했다. 순간적으로 몇 가지 대사 후보안이 떠올랐다.
 
- 안 좋아해요. 지니 님이 좋아하는 거 아니에요?
- 지금은 안 좋아하지만, 내일부터 좋아할게요.
- 안 좋아해요, 사랑해요.

이 중에서 하나 결정하고 말했다. 

 

“안 좋아해요, 사랑해요.”

 

코치는 빵 터지고 지니는 얼굴이 붉어지며 어쩔 줄 몰라 하고 있었다. 
함부로 말하지 말라는 의도가 전달되었을까?
플로어를 한 바퀴 돌고 코치가 다른 곳으로 가자 구석에 둘만 있게 되었다. 지니가 결심한 듯 말했다.

 

“몽도님, 얼굴은 조각 미남인데 조금만 웃으면 더 좋을 거 같아요. 너무 무표정이에요.”

 

나는 그 말을 듣는 순간, 충격을 받아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어떻게 보면 평범한 말로 들릴 수 있으나 당사자인 나를 평하면서 무표정이라 싫다는 의미로 말한 것이다.

무표정이라는 것은 예전에 루비가 말해서 알고는 있었지만 지니에게 듣게 되어 또 다른 기분이었다. 

 

 

8. 파트너를 바꾸라고

 

 

이번 해에는 나도 단체전인 포메이션도 참여하기로 했다.
단체전은 개인이 하는 것보다 더 역동적이고 화려하다. 그리고 같은 동작으로 동시에 움직여야 한다.
그래서 연습을 더 많이 해야 하고 팀워크가 잘 맞아야 한다.
파트너는 개인종목에서 짝을 이룬 같은 파트너와 하기 때문에 지니와 함께 연습하는 시간이 더 많아졌다. 
나는 지니와 같이하는 것이 좋아 포메이션 시간이 즐거웠다. 
그 감정은 이중적인 감정이다. 싫은데 좋은 감정인 것이다. 평소에는 나를 피하는 느낌이라 싫은데 다시 춤출 때는 즐거운 얼굴로 추니 좋은 감정인 것이다.

다시 댄스에 재미를 느끼려고 하는데 어느 날 갑자기 내 파트너가 바뀌어 있었다. 갑자기 파트너를 바꾸니 머리가 아팠다.

 

“왜 바꾼 거래요?”

 

나는 지니에게 물어보았다.

 

“시각 팀에 있던 스탠드 단원이 처음 하는 휠체어 댄스에 익숙하지 않아서 내가 대신 그쪽으로 가게 됐어요.”

 

새로 바뀐 파트너와 하기 싫은 연습을 끝내고 집에 가서 잠을 자려니 잠이 오지 않고 답답하고 머리가 지끈거렸다. 
그래서 나는 감독님에게 파트너 바꾸니 힘들다고 직접 만나서 말했다. 

 

“몽도, 우리 시가 1등 해야지. 조금만 참고 해 줘.”

 

그다음 주 연습에 나갔더니 분위기가 좋지 않았다. 

 

“몽도, 다른 지역으로 가.”
“갈려면 지니와 같이 갈게요.”

 

감독님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지니는 얼굴만 또 빨개졌다. 옆에 있는 사람들은 와, 하며 감탄사를 내뱉었다.
그날, 지니는 화난 사람처럼 아무 표정 없이 춤을 추는 둥 마는 둥 했다.

 

“아니 왜 내 파트너를 바꾸고 다른 사람도 있는데 왜 나만 희생당해야 하냐고?”
“팀이 우승해야죠.”

 

나는 억울하다는 듯 호소를 해봤지만 지니는 팀이 우선이라는 말 외에는 하지 않았다. 감독님과 단장님은 우리 사이의 기류를 눈치챘다. 그 일 이후부터 단장님은 뭐라고 말하지는 않았지만 나만 쳐다보는 느낌이 들었다. 
나는 지니와 한적한 공원 벤치에서 나란히 앉아 재미있는 이야기를 하고 싶었다. 
그러나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지니는 내 동작에 대해서 지적만 하는 것이었다
나는 앉아있고 지니는 서서 말하고 있어 교사가 학생을 야단치는 것 같았고 나는 지니를 우러러보는 것 같았다.
  
지니는 무표정으로 아무 말 없이 계속 같은 동작을 이어갔다. 그러다가 다시 도는 동작에서 너무 크게 힘을 주며 돌려서인지 나는 그대로 휠체어와 함께 땅으로 고꾸라졌다.
쿵, 하고 큰 소리와 함께 넘어지자 다른 팀원들이 깜짝 놀라 돌아보았다. 감독님도 놀라 쳐다보며 달려오셨다.

 

 

“다친 데 없니?”

 

나는 금방 일어나지 못하고 쓰러진 상태에서 몸을 움직이지 못했다. 넘어지면서 저번에 다친 손가락을 세게 짚었는지 손가락이 아팠다.

손가락을 보니 가운뎃손가락 중간 마디가 하늘 위로 솟구쳐 뼈마디가 어긋나 튀어나왔고 피부가 찢어져 피가 보였다. 

 

“어머, 어떡해! 큰일 났다.”

 

이런 소리가 들리며 누군가 급하게 119를 불렀다.
나는 일어나지 못하고 부러진 손가락만 쳐다보고 있었다.
5분 후 구급대원이 와서 들것에 싣고 나를 차에 실었다. 어쩔 줄 몰라 하며 지니도 같이 차에 올랐다.
 

 

9. 구름 타고 가는 기분

 

그 다음 주는 손가락이 아파 연습을 빠져야 했다. 
손가락을 다친 이후로 지니 태도가 달라졌다. 내 무릎에 앉는 동작을 할 때 내 품에 안기듯이 깊이 앉아 내 뒷목을 꽉 잡았다. 그럴 때는 짜릿, 정전기가 지나간 것 같다. 
지니의 이런 행동은 어떤 의미일까? 죄책감일까, 친근감의 표현일까? 
무리하면 정작 체전 때 참가할 수 없게 되므로 지니는 손이 아닌 내 손목을 잡았다.
몸은 아팠지만, 정신은 쾌감의 극치였다. 
나는 내 기분을, 마주 본 지니에게 이렇게 표현했다.

 

“구름 타고 가는 것 같아.”

 

깔깔깔깔 좋아서 웃는 소리는 이 지상에서 들을 수 없는 소리다. 인간의 웃음소리가 이렇게 아름다워도 되는 것일까.

 

“저 달까지 날아가는 것 같아.”

 

정말 그랬다. 공중을 나는 듯이 몽롱하고 마스터베이션할 때처럼 아주 짜릿한 쾌감이 들었다. 
지니를 기분 좋게 만드는 방법은 내 기분이 좋아지는 것이고 그것을 지니에게 적절하게 표현하는 것이다.
 
추석이 되자 그날은 연습을 쉬고 집에서 명절을 보냈다.
단체 대화방에 추석 잘 보내라고 축하 문자와 그림들이 올라오기 시작했다. 올라오는 그림들은 어디서 많이 본 듯한 그림과 글귀였다.
‘해피 추석! 명절 잘 보내세요!’
‘더도 덜도 말고 한가위만 같아라.’
나는 이런 뻔한 것들이 싫었다. 뻔한 것들이 많아지면 뻔뻔해진다. 
우리가 댄스를 하는 사람이니 직접 우리의 모습을 올리는 게 좋다고 생각했다. 

 

 

나는 컴퓨터를 켜고 포토샵 프로그램을 열었다. 
커다란 보름달을 배경으로 하고 지니와 휠체어 댄스를 추는 사진을 올가미 도구로 오려내어 합성했다. 
그러자 노랗고 밝은 달 속으로 휠체어 선수와 스탠딩 선수가 손을 잡고 춤을 추며 들어가는 듯한 그림이 되었다. 
나는 정말 지니와 춤을 추며 달 속으로 들어가는 기분이 들었다.
대화방에 사진을 올리자 반응이 바로 올라왔다.


‘와우, 멋져요!’
‘환상적이네요!’
‘빵, 터졌습니다.’


맨 마지막 반응이 지니의 반응이었다.

나는 진지하게 올렸는데 빵 터지다니. 다른 사람들은 멋있다고 하는데 왜 터지는 거야? 쑥스러워서 그런가?

겨울 내내 지니에게서 연락이 한 번도 없었다. 올해 댄스는 끝났지만, 지니를 만나고 싶었다. 
나는 어디로 가면 만날 수 있는지 알고 있었다. 일요일에 지니가 다니는 교회에 가면 만날 수 있다. 
하지만 나는 가지 않았다. 안부 문자만 보냈다. 답장은 오지 않았다.
어느 저녁때 갑자기 복통이 찾아왔다. 
밤 12시가 되자 낫지는 않고 통증이 더하더니 아랫배가 찌르듯이 아팠다. 너무 아파 온몸이 쥐어짜는 듯했고 춥고 열도 나서 구급차를 부르고 응급실로 실려 갔다.
급성 맹장염 같다고 했다. 이름도 어려운 ‘충수돌기’를 수술로 떼어내야 한다는 것이다. 

 

 

10. 루비와 타이타닉을

 

 

병원에 나를 찾아온 것은 지니가 아니라 루비였다. 
핸드폰벨 소리가 울려 발신자를 보니 루비였다. 오랜만에 보는 이름이라 반가움에 얼른 전화를 받았다. 
병원에 있다고 하니까 오겠다고 했을 때, 외로울 때 찾아오니 신의 축복을 받은 기분이었다. 

병실 문을 열고 저쪽에서 성숙한 여자가 들어왔다. 
2년 만에 본 루비는 눈이 더 커진 것 같았고 더욱 화려해 보였다. 처음엔 루비 같지 않아 다른 환자 방문객인 줄 알았다. 
루비가 다가와 먼저 말을 했다.

 

“안녕, 천재!”


 
퇴원 후 루비는 공연을 자주 잡아 나와 자주 만났다. 
연습을 하던 중 루비가 내 등을 탁 때리면서 정신을 번쩍 들게 했다. 

 

“너 요즘 고민 있냐? 왜 이렇게 멍때려.”
“춤 출 때는 재미있지만 집에 가면 또 죽고 싶어.”
“그럼 죽어.”
“같이 죽을래?”
“뭐래? 네가 먼저 죽는 거 보고 죽을게.”
“세상이 왜 이래. 아! 엿 같아. 왜 세상이 이렇게 돌아가는 거야? 오늘도 게걸스럽게 왜 먹는 거에만 관심있고, 수많은 사람은 왜 치고받고 싸우며 지하철에 몰려와 어디론가 가는 거야?”

 

루비와 함께 공연은 자주 했다. 1주에 한 번 이상은 했고 어떤 주는 2번도 할 때도 있었다. 경력이 짧은데도 자주 한 셈이다.

 

“타이타닉으로 안무하면 어때?”

 

지니와 하려던 타이타닉이었는데 루비에게 물어보았다.
말을 꺼내니 루비가 적극적으로 나왔다.

 

“와! 그거 멋있겠다. 나도 영화 재미있게 봤어.”
“그럼 타이타닉 해볼까?”

 

안무를 만들기 위해 영화 ‘타이타닉’을 다시 3번을 보았다. 
타이타닉의 명장면은 배 위에서 두 팔을 벌린 장면만 있는 것은 아니다. 우리는 의견을 나누며 안무를 결정했다.

 

“첫 등장은 잭 도슨이 급하게 배에 오르는 장면이니 휠체어를 타고 내가 빠르게 나오고 루비는 우아하게 등장해. 그러다가 서로 멀리서 처음으로 바라보는 거야.” 

 

 

11. 이제부터 반말할 거야

 

 

다시 해가 바뀌고 나는 고등학교 2학년이 되었고 지니는 대학교 사회복지학과에 입학했다. 
고등학교 2학년과 대학교 1학년. 이런 문장만 보면 큰 차이가 나는 것 같다. 
그러나 실상은 나이 한 살 차이일 뿐이다. 실체와 표현으로 느끼는 것은 다른 것이다. 
이제부터 반말 할 거야.

 

"내가 좋아하는 사람이 나를 좋아해 주는 건 기적이다." 

 

이건 무슨 뜻일까? 지니가 자기 채팅앱 프로필에 이렇게 써놓은 것을 한참이나 생각했다. 
자기는 나를 좋아할 일 없으니 꿈을 깨라는 말인가? 아니면 서로 좋아지는 기적을 바란다는 말인가?

지나가던 사람들이 우리가 연인처럼 나란히 걷자 힐끔힐끔 쳐다보았다. 
남자는 절뚝이며 지팡이를 짚고 있고 늘씬하고 키 큰 여자는 남자를 부축하며 걷는 장면이 내가 생각해도 특별한 사연이 있는 것으로 보일 것 같다. 
어떤 대학생 같은 녀석이 우리를 앞질러 가며 지니의 얼굴을 확인하고 저 앞으로 사라졌다. 
뭘 봐? 왜 그런 행동을 했는지 이유는 충분히 안다. 도대체 다리 저는 남자를 부축하듯 가는 여자의 얼굴이 어떻게 생겼는지 확인하기 위해서이다. 그 남자는 질투심을 느꼈을까?

 

“저 사람, 왜 쳐다봐?”
“그니까, 기분 나빠.”

 

지니는 진심으로 기분이 상한 것 같았다.

 

“너무 힘들 때는 그냥 없어지는 것도 좋을 것 같아요.”

 

지니의 반복적인 말에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왜, 라고 물어보는 것보다 이때는 침묵이 더 적절하다. 

 

“나도 그랬는데.”

 

지니가 고개를 돌려 내 얼굴을 보았다. 나는 말을 이어갔다.

 

“사고 난 다음에, 죽고 싶었어. 그런데 나와 같은 장애인들이 이 세상에 많고 즐겁게 사는 것 같아서 놀랐어. 그리고 춤을 추니 다른 생각이 안 들었어.”

 

지니는 잠시 말이 없더니 다시 슬픈 목소리로 말했다.

 

“난 고슴도치예요. 너무 가까이 오면 찔러요. 부모님은 나에게 거는 기대가 높아요. 엄마는 아버지와 싸움하고 나서 히스테리를 나한테만 부려요. 언니와 오빠는 공부를 잘해서 잘 해주고 나한테만 뭐라고 해요. 난 태어나서 한 번도 사랑을 받아본 적이 없어요. 남에게 잘하라고만 가르치고.”

 

나는 상처가 보이지 않는다고 상처가 없으리라는 1차원적 생각을 빨리 바꾸고자 했다. 보이지 않는 상처가 어쩌면 더 클 수도 있다. 나는 가방에서 휴지를 꺼내 지니의 눈물을 닦아주려 했다. 지니가 잠깐 움찔하더니 가만히 있었다. 나는 지니의 눈물을 닦아주며 말했다.

 

“결함은 멋진 거래.”

 

갑자기 생각나서 말했는데 뜬금없다고 생각할지도 몰랐다.

 

“누가 그래요?”
“어떤 아줌마가?”
“그 아줌마 멋지네요. 진짜 멋진 말씀이에요.”

 

 

12. 나도 빨래 잘 널어

 

 

“이번에 내가 속한 봉사단체에서 양로원에 자원봉사 가는데 같이 갈래요?”

 

지니가 밝은 표정으로 물었다. 일부러 밝게 보이려고 애쓰는 모습이 조금 애처로웠다.

 

“그럴까?”

 

나는 사실 자원봉사를 하고 싶은 마음은 없었으나 지니가 부탁했고 지니와 같이 뭔가를 해보고 싶어 승낙했다.
내 생각으로는, 지니는 자원봉사를 통해 오빠의 죽음을 조금이라도 잊어보려 하는 것 같았다. 아니면 봉사는 계속해오던 것일지도 모른다. 어쨌든.
12인승 승합차에 12명이 타고 1시간을 달렸다. 
도착한 양로원은 건물부터 쓸쓸하고 애처로워 보였다. 실내로 들어서자 석고처럼 움직이지 않고 앉아있는 노인들이 여기가 양로원이라는 것을 알려주었다. 자세히 보니 혼자 움직이는 노인도 있었고 침대에 누워만 있는 노인도 있었다. 
여기서 할 일은 노인들 씻겨주기, 밥 먹여주기, 빨래하기, 같이 노래 부르기 등이었다.
나는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지니만 따라다니며 옆에서 지니가 하는 것을 도와주었다. 
노인들 씻겨줄 때는 물을 받아 주고 밥 먹여줄 때는 떨어진 밥풀을 주워 담았다.

빨래를 널 때였다. 빨래는 거들어 줄 게 없어 같이 널어주면 되었다. 빨래 널기는 어려운 일이 아니다. 내가 옆에서 빨래를 능숙하게 널어주니 지니 얼굴에 빙그레 미소가 피어올랐다. 지니가 빨래를 들어서 주면 내가 줄에 널었다. 
지니는 내가 빨래를 널어주는 것이 신나는지 연신 즐거운 표정이었다. 마치 행복한 공주가 된 표정이었다.
 
돌아오는 길에도 차에서 서로 마주 앉아 왔는데 이번에도 차가 급정거하자 지니가 내 허벅지를 꽉 잡았다. 
약간 가늘어진 허벅지를 누가 만지는 것을 싫어했는데 지니가 꽉 잡으니 온몸에 짜릿한 전율이 지나갔다. 한 번 더 만져! 이런 말을 하고 싶어질 정도로 짜릿한 쾌감이었다.
목걸이가 계속 보이길래 물었다.

 

“처음 보는 목걸이네.”
“오빠 목걸이에요.”
“잘 어울려.”
“고마워요.”

 

승합차에서 내려 전철역까지 걸으며 지니가 말했다.

 

“빨래 널어줄 때 너무 좋았어요.”
“나는 빨래 잘 널어. 외로울 때도 빨래를 널고 화가 날 때도 빨래를 널어. 그러면 외로움과 화가 사라져. 아무 생각이 안 들고 즐거워져.”

 

빨래 하나로 지니의 마음이 나에게 쏠리다니 나는 더 자주 빨래를 널어줄 수 있다.

 

 

13. 지니 밑으로 깔리고 싶다

 

 

어느 바람이 조금 부는 날, 다시 패러글라이더를 타게 되었다. 바람이 불어 다음에 타자는 의견이 있었다. 
그러나 소수 의견이었고 대다수는 여기까지 왔는데 이 정도 바람은 별거 아니라는 의견이었다. 
나는 처음이라 그 바람에 대해 판단하기가 어려웠다.

그날 나는 패러글라이더를 타다가 천국과 지옥을 동시에 맛보았다. 
천국은 1분 동안 맛보았고 그다음부터는 지옥이었다. 하늘을 나는 환상적인 기분은 잠깐이었고 암울하고 답답한 기분은 길었다.
출발은 좋았으나 나중은 비참했다. 1분 정도 하늘을 날던 내 패러글라이더가 지니의 패러글라이더 줄과 엉키는 것 같더니 바로 만유인력의 법칙을 따랐다. 
지니의 얼굴을 쳐다보니 그렇게 겁먹은 얼굴은 처음 보았다.
나는 지니를 살려야 한다, 지니보다 내가 먼저 떨어져야 한다고 생각했다. 지니가 다치면 안 되었다. 
언젠가 읽은 칼릴 지브란의 이런 시가 떠올랐다.

사랑의 날개가 그대를 감싸거든 그에게 온몸을 맡겨라. 
비록 날개 속에 숨은 칼이 그대를 상처 입게 하더라도

나는 있는 힘을 다해 소리쳤다.

 

“지니, 나를 꽉 잡아!”

 

나는 지니를 공중에서 잡고 지니 밑으로 들어갔다. 실제로는 아주 짧은 순간이지만 내가 느끼기에는 아주 긴 시간처럼 느껴졌다.
지니는 나를 붙잡고 자기가 밑으로 깔리려고 들어갔으나 나의 힘이 더 셌다. 신이 나의 힘을 더 세게 만들었으니 이건 내가 밑으로 깔리라는 신의 명령이다.
쿵, 소리가 들리고 아늑했다. 무엇에 한 번 부딪히고 땅으로 떨어진 것 같았다. 
내 위로 지니가 떨어졌다는 것을 느꼈고 나는 지니를 한동안 껴안고 있어서 포근했다. 조용하고 하얗고 깊은 잠에 빠졌다. 

눈을 뜨니 천장이 하얀색이었다. 집이 아닌 것만은 확실했다. 
처음에는 실감이 나지 않아 꿈을 꾸거나 다른 나라에 와 있는 기분이었다. 지니와 계속 안고 있는 꿈을 꾸었는데 깨어보니 지니는 품 안에 없었다.
통증이 몰려오기 시작하면서 현실이라는 것을 실감하게 되었고 죽지는 않았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다면 아픔, 기쁨, 슬픔은 살아있음을 느끼게 하는 감정이다. 많이 느껴봐야겠다.
흉추 6번 손상으로 하반신이 완전히 마비되었다. 감각도 없고 움직일 힘도 없다. 이젠 걸어 다닐 수 없다.

내가 자초한 일이지만 헛웃음이 나왔다. 실감이 안 나서 마치 판타지 만화를 보는 기분이었다.

 

 

14. 네 옆에 있으니 잠이 잘 와

 

 

병원에서의 6개월은 지니가 함께 해서 지루하지 않았다. 
지니가 없는 낮에는 활동 범위가 한정되어서 지루했고 아픈 사람들만 보니 침울해졌다. 그러다가 지니가 오는 시간만 되니 다시 활기를 찾아 하루 중 그 시간만 기다리게 되었다.

지니는 토요일마다 병실에서 자고 갔다. 
지니는 내가 누운 침대 위로 올라와 내 옆에 나란히 누웠다. 
지니는 손으로 내 가슴을 만지더니 점점 밑으로 내려가기 시작했다. 배까지는 감촉을 느꼈지만, 그 밑으로는 감각을 느끼지 못하므로 그 아래까지 만졌는지는 잘 모른다. 
지니는 부드러운 손으로 내 부르튼 입술을 만지더니 곧 자기 입술을 가져다 댔다. 
그때 간호사가 들어오지 않았다면 더 깊이 음미할 수 있었을 것이다.

 

“침대에 보호자가 올라가면 안 돼요.”

 

간호사는, 누가 만들어놓은 규칙인지 모를 말을 했다. 
황홀한 꿈을 마녀가 나타나 확 깨는 기분이었다. 

 

 

15. 한국의 라라공원

 

 

“넌 꿈이 뭐니?”

 

지니가 꿈에 대해 나에게 물었다.

 

“난 꿈이 많아. 하지만 지금은 계속 춤추고 싶어.”
“넌 각자 꿈을 이루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해? 사랑을 이루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해?”

 

지니는 라라랜드 영화 결말에서 주인공들이 각자 꿈을 위해 헤어진 것에 관해 물어보는 것 같았다.

 

“난 사랑이 더 중요해.”

 

나는 생각하지 않고 바로 대답했다.

 

“왜?”

“그게 더 행복을 줘.”
“조금 의외다. 꿈을 이루는 게 중요하다고 말할 줄 알았는데.”
“사랑하면 꿈이 이뤄져. 사랑하면 춤이 잘 춰지고 그러면 계속 출 수 있잖아. 사랑하면 행복해져서 하는 일이 즐거워.”
“그렇구나.”
”그리고 라라랜드 결말이 마음에 안 들어. 그렇게 사랑했으면서 왜 헤어진 거야? 우리는 결말을 조금 바꿔서 하자.”

 

나는 내 생각을 말했다.

 

“왜? 아무리 그래도 결말은 그대로 해야지.”

 

나는 더 좋은 방법을 생각해 보았으나 아무리 생각해도 아이디어가 떠오르지 않았다. 결국 일단은 결말은 빼고 연습하기 시작했다.

 

“서울에 영화 라라랜드에 나왔던 언덕 같은 곳이 있어.”
“어디?”

 

남산타워가 보이는 곳에 가서 우리는 라라랜드에 나오는 춤을 그대로 따라서 해 보았다.

 

 

16. 일반인 댄스파티에 휠체어

 

 

지니가 아는 친구가 크리스마스이브에 댄스파티가 열리는 곳에 참가하자 했다고 한다.
그곳에서 나는 유일한 휠체어이기에 시선이 집중되었지만 대부분 호의적인 표정이었고 그들도 새로운 체험이라 신기해하면서도 환영하는 표정이었다.

대부분 댄스 파트너와 같이 참여한 것 같았고 미리 준비된 프로그램과 순서에 의해 한 명씩 나와서 춤을 추었다. 
빙 둘러싼 테이블에서 칵테일과 다과를 즐기며 모두 여유있게 구경했다.
우리도 미리 준비해 간 프리댄스 라라랜드를 보여주었다. 
 
지니와 춤을 다 끝내고, 깊은 포옹을 하며 뜨겁고 영혼이 떨리는 느낌을 맛보았다.
이어서 다 같이 나와서 같이 춤을 추는 시간이었다. 
서로 몸이 조금씩 부딪힐 정도로 사람들이 밀집되었다. 
나도 지니와 춤을 추었는데 옆 사람이 휠체어에 다칠까 조심스럽게 움직였다.
어떤 여자가 다가오더니 한 번 같이 춰봐도 되냐고 나에게 물었다. 
나는 기본 홀딩 동작을 가르쳐 주고 기본 동작을 해보았다.

그 여자가 가고 나니 다시 다른 여자가 와서 춤추는 방법을 물었고 또 기본 동작을 가르쳐 주며 춤을 추었다. 
그렇게 나는 많은 여자에게 휠체어 댄스를 가르쳐 주느라 파티의 시간을 다 보냈다.

 

 

17. 모두의 천사가 되려는 거야?

 

 

지니와 ‘썸 탄다’는 디카프리오에 대해 궁금해서 지니에게 물었다.

 

“디카프리오와 썸탄다는 말이 사실이야?”
“나는 모르겠는데 자기가 그렇다니까 그런가 보지.”
“지니는 싫으면 도망가는 성격인데 안 그런 거 보니 싫지는 않은가 보지?”

 

나는 지니의 속마음을 알고 싶어 돌직구를 던졌다.

 

“그런 거 묻지 마. 우리만 있을 때는 우리 얘기만 하자.”
“이거 우리 얘기잖아.”
“디카프리오는 좋은 친구야. 봉사도 많이 하고 착해.”

 

지니의 목에서 불안하게 흔들리는 투박한 열쇠 목걸이가 지니와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왜 말이 없어?”
“어떤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겠어.”
“이만 갈게.”

 

뒤돌아서는 지니 뒤통수에 대고 나는 소리 높여 말했다.

 

“잠깐만!”

 

지니는 돌아보지 않고 한 발짝 내디디며 말했다.

 

“오늘은 갈게. 또 연락할게.”

 

이대로 가면 영영 보지 못할 거 같아 나는 소리높여 외쳤다.

 

“니 마음대로 왔다가 마음대로 가는 거야? 난 허수아비네. 바퀴 위에 올라 앉은 허수아비.”

 

그 말을 듣더니 지니가 뒤돌아서 바라보았다. 잠시 생각하더니 다시 앞으로 걸어가려 했다.
나는 지니를 잡으려다가 휠체어가 넘어지며 땅에 쓰러졌다.
쿵 소리가 들리자 지니는 한 번 나를 쳐다보았다. 잠시 갈등하며 망설이더니 그것뿐이었다. 지니는 고개를 바로 돌리고 그대로 뛰어갔다.
땅에 쓰러진 나는 저절로 애처로운 눈빛으로 변했다. 손을 뻗으며 지니를 갈구하는 눈으로 쳐다보았다. 누가 그 모습을 보았다면 애처롭고 슬프다고 했을 것 같다.
다섯 발을 뛰어가다가 돌아서서 내 눈빛을 보고 지니는 손을 머리에 짚고 잠시 고민하더니 다시 돌아서서 치맛자락을 날리며 뛰어갔다. 그 순간 나는 땅에서 반짝이는 것을 보았다. 지니가 떨어뜨리고 간 목걸이였다. 
나는 떨어진 목걸이를 주웠다. 내 손바닥에서 지니의 목걸이가 반짝였다.
나는 외쳤다.

 

“목걸이!”

 

저쪽 끝 계단으로 뛰어 내려가려던 지니가 그 소리에 뒤를 돌아보다가 쿠당탕탕, 소리와 악! 비명이 들리면서 계단 밑으로 사라졌다.
나는 그쪽으로 팔을 땅에 디디고 상체의 힘으로 기어서 갔다. 
계단 위에서 보니 저 끝 계단 밑으로 굴러떨어진 지니가 일어나지 못하고 쓰러져 있었다. 몇 바퀴를 굴렀는지 옷이 흙투성이가 되었고 치마와 블라우스가 마구 구겨져 있었다. 
발목을 다쳤는지 지니는 발을 부여잡고 고통을 호소하고 움직이지 못하고 신음소리를 냈다. 옆에는 떨어진 구두가 벗겨져 나뒹굴고 구두굽이 떨어져 있었다. 
나는 계단을 스파이더맨처럼 기어서 내려갔다. 팔이 조금 쓸려 약간 쓰라렸다. 힘들게 계단 아래로 다가가 살펴보았다.
다행히 지니는 다른 곳은 다치지 않았고 발목만 삔 것 같았다. 퉁퉁 부은 지니의 발을 보고 나는 어찌할 줄 모르다가 셔츠를 찢어 지니의 발이 움직이지 않도록 붕대처럼 감았다.
지니는 나의 행동을 음미하듯 가만히 쳐다보았다.
귀걸이를 내밀자 그것을 받아든 지니는 미안함과 고마움으로 어쩔 줄 모르는 표정이었다. 물론, 이건 내 느낌이다.

 

 

18. 사는 것은 시소 같아서

 

 

지니가 몸에 힘을 주어 아래로 내려가자 나는 위로 올라가 붕 떴다. 
다시 지니가 가볍게 하고 위로 올라가자 나는 아래로 내려왔다.

 

“인생이 마치 시소를 타는 거 같지 않아?”
“맞아. 올라갈 때도 있고 내려갈 때도 있고.”

 

위로 올라갈 때마다 서로 하고 싶은 것을 말하기로 했다.

 

“춤추는 내용으로 글을 쓰고 싶어. 춤은 현재를 위해 추지만 글은 내 몸이 없어져도 남아 있잖아. 내가 영원히 남아 있는 방법은 글을 쓰는 거야.”
“트랜스포머 휠체어 하나 사서 세계 일주를 하고 싶어.”
“경비행기 조종하고 싶어.”
“인명구조원 하고 싶어.”
“내가 쓴 시에 맞춰 춤추고 싶어.”

 

우리는 지칠 때까지 계속 시소를 탔다.

 

 

19. 몸으로 시 쓰기

 

 

지니하고도 행사 공연을 하기 시작했다. 
지니가 먼저 자신감을 보여 여기저기 팸플릿을 돌리고 협회에서도 공연 의뢰가 들어오면 하겠다고 말을 해 놓았다.
나는 지니에게 물었다.

 

“전에 내가 쓴 시에 맞춰 댄스하는 게 내 꿈이라고 했지? 기억나?”
“응.”
“우리 공연 때 그렇게 해볼래?”

 

드디어 기회는 쉽게 왔다. 
중학교 초청 공연이었다. 우리가 마음대로 고른 음악으로 할 수 있는 무대였다. 
대상 나이도 충분히 춤과 시를 이해할 수 있는 나이라 알맞았다.
미리 녹음한 시 낭송에 맞춰 우리는 춤을 추었다.

 

물고기가 물속을 헤엄치듯이. 
내 마음의 물결을 일렁이게 하는 어떤 감정을 느낀 듯이, 내가 물고기가 된 듯이.

 

내가 쓴 시에 맞추어 춤을 추니 그냥 혼자 시를 읽은 것보다 두 배 정도 기쁨이 넘쳐흘렀다.
나는 춤을 추면서 내가 쓴 시의 내용을 다 들을 수 있었다. 
시 내용을 깊이 음미하니 물속에서 헤엄치는 것 같았다.

 

 

 

- 마침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