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08-24
박정숙 시집
통증일기
시_박정숙, 삽화_챗GPT
통증일기
시집 <통증일기>는 2025년 도서출판 끌레마에서 출간된 화제작이다.
공장 노동자에서 시인이 되기까지 박정숙의 65년 인생 서사가 담긴 모험 이야기가 다큐멘터리를 보듯 생생하여 독자의 가슴을 뒤흔든다.
박정숙
(시집 앞날개 소개 글을 그대로 옮김)
배제와 차별
학대와 혐오가 만연한 세상에
살아남은 생존자
나는 60대 장애여성이다.
외롭고 어두운 유년을 보냈고
생존을 위해 부단히 노력하며
20여 년간 봉제 노동자로 살았다.
2013년 노들장애인야학을 알게 되었고
초.중.고를 검정고시로 졸업했다.
현재는 (사)노란들판에서 일하고 있다.
나 혼자로는 미미하지만 동지들과 함께 차별과 편견, 혐오에 저항하며
나의 후배들이 더는 투쟁하지 않고
각자 주어진 삶을 자유롭고 평등하게 사는 세상을 꿈꾸며
나는 오늘을 살고 있다.
작품 소개
박정숙 시인은 자신은 시인이 아니라고 말하지만 <통증일기>에 담은 한 편 한 편의 글은 자신의 경험에서 우러나온 감정들을 걸러내고 또 걸러내어 맑디맑게 정제시킨 가장 귀한 생명수이다.
그녀가 글을 쓰지 않았다면 세상을 다 품을 수 있는 큰 가슴을 갖지 못했을 것이다.
박정숙은 우리 시대가 낳은 대인(大人)이다.
아마 다시는 이런 경험으로 <통증일기>를 쓰는 시인은 나타나지 않을 것이다.
그래서 <통증일기>는 우리 시대의 필독서라고 생각한다.
그녀가 시를 통해 자신의 이야기를 했기에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었다는 것을 생각할 때 역시 장애인문학의 역할은 위대하다.
시인이 아니다
나는 시인이 아니다
다만
가슴에 불이 있을 뿐
시를 공부한 적도 없고
시를 쓰는 형식도 모른다
삶이 너무 뜨거워서
담고 있지 못해 토해냈을 뿐
나는 시인이 아니다
다만
가슴에 강이 흐를 뿐
맞춤법도 다 틀리고
말도 어눌하다
흐르는 물이 어지러워
주저앉아 눈물 흘릴 뿐
나는 시인이 아니다
-
첫 행에서 박정숙은 “나는 시인이 아니다”라는 선언을 한다.
가슴에 불이 있고, 삶이 너무 뜨거워서 담고 있지 못해 토해냈을 뿐이라고 하였다. 또한 가슴에 강이 흐르고 있는데 그 물결이 어지러워서 주저앉아 눈물을 흘리는 것뿐이라고 하였다.
그러니까 그녀의 시는 가슴 속에 있는 열정과 아픔의 표출인 것이다. 그것들이 없었으면 그녀의 시는 탄생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녀는 글을 통해 토해내고 흘러내리게 할줄 아는 시인임에 분명하다.
다리에게
어느 누가
나만큼 종종거리며 살았다 한들
너만큼이랴
하고 싶은 것도, 할 일도 많았지만
너만큼 고단했으랴
고운 마음 키워주지 못한 것이
누구탓이든
오늘을 주물러 내일을 간다
힘없고 하찮아도
인생길 어제와 오늘 또 내일
누군가
병신이라 내친다 한들
기어오를 오기 가진 것이
너 말고 또 있으랴
-
이제부터 필자는 그녀가 아닌 시인이라고 칭한다.
‘다리에게’라는 시는 자기애의 발로이다.
소아마비로 가느다란 다리는 그녀가 살기 위해 몸부림친 과정을 고스란히 지탱해주며 이겨냈다.
그래서 시인은 그 볼품없는 다리가 안쓰럽기도 하고 고맙기도 한데 사람들은 그 다리를 보고 장애인이라 낙인을 찍는다.
하지만 시인은 그 장애가 세상과 맞설 오기를 만들어준 추동력이었다고 독자들에게 말해준다.
반란의 이유
자정이 훌쩍 넘었다
눅눅한 어둠이 지하 공장에 퍼지고
하나둘 사열을 마친
형광등 아래 무거운 눈꺼풀은
사력을 다해 마지막 떨림을 잠재운다
블랙커피 한 잔과 박카스 한 병
배고픔도 잊고 잠도 잊었다
부어오른 다리로 밤새 미싱을 밟고
불꽃 날리는 재단 칼의 굉음은
온몸을 돌아 몽롱한 기억을 아득하게 한다
수십 억의 뇌물이 오가고
무슨 무슨 커넥션 리스트가 오르내리고
명품 매장은 품절사태
삼백만 원이 넘는 밍크코트
세관 창고를 메우는 수백만 원짜리
양주, 골프채, 핸드백
지치지 않는 라디오는
밤을 지나 새벽까지
전설처럼 머나먼 이야기들을 쏟아내고
여자는 미싱에 손가락을 박았다
사방에 흩어지는 핏방울
울지도 않는 여자는
손가락에
미싱 기름을 붓는다
그렇게 한 달을 일해도
그녀는 명품가방 하나 들어볼 수 없었다
-
시 ‘반란의 이유’는 공장 노동자로 일하던 시절의 서사이다.
몇푼 벌기 위해 배고픔도 졸음도 참아가며 미싱을 돌리다가 시인은 미싱에 손가락을 박아 핏방울이 사방으로 흩어지는 상황 속에서도 손가락에 약을 바르지 못하고 미싱 기름을 상처에 붓고 다시 미싱을 돌리는 고단한 삶을 살았다.
그때 사회지도층에서는 명품, 뇌물, 불법 등이 자행되고 있었다.
그래서 시인은 이유있는 반란을 끊임없이 시도했던 것이다.
그녀는 비록 자신은 깨지더라도 우리 사회의 부조리를 작은 몸짓으로라도 항변하며 살았던 정의파이다.
당신이 내게 오던 날
젖은 신문지에 돌돌 말아 쥔
장미 향기 뒷짐져 숨기고
잠든 심장 기지개로
하품 뱉어내 깨워 세수시킨다
웃음 주름 한가득 얼굴 빛나고
악수를 청하는 쑥스러운 첫인사에
선뜻, 손 내밀지 못하고
얼굴 붉혀 웃기만 한 것은
말하지 않은 속 사랑이
보일까 두려워
큰 웃음으로 대신한 것을
당신은 알지 못했었다
당신이 내게 처음 오던 날
사랑은 벌써 자리를 펼쳐 앉아
바구니를 열고 차를 끓인다
-
시 ‘당신이 내게 오던 날’을 읽으면서 벽에 걸린 수채화를 감상하는 듯 그 모습이 그려진다.
이 시가 박정숙 작품이 맞나 싶을 만큼 여성적이고 수줍음 가득한 순정만화 주인공 같은 느낌이다.
시인도 사랑 앞에서는 무장해제가 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시인은 사랑의 자각을“잠든 심장 기지개로/하품 뱉어내 깨워 세수시킨다”고 표현하였다.
우리 사회는 여성장애인을 무성(無性)의 존재로 만들었기에 사랑 세포가 잠을 자고 있었는데 당신이 잠에서 깨워주어 하품을 하면서 기지개를 켜게 한다는 것은 숲속에서 잠든 백설공주에게 입맞추는 왕자를 떠올리게 한다.
그런데 시인은 이런 동화적 요소를 현실로 당장 끄집어낸다. 바로 세수를 시킨다는 것이다.
사랑은 그녀 얼굴에 묻은 과거의 찌든 기억을 말끔히 씻겨 주었다.
당신에게
살아야겠습니다
스치는 겨울 바람의 차가움이
귓불을 찢고 지나던 아침
등 뒤에 늘어진 그림자의
힘없이 굽은 어깨를 보았습니다
모르는 사이에 굽었을까요
분명 꼿꼿이 허리 세우고
어깨 펴며 살았던 것 같은데
꼬리표처럼 따라오는 세월이
힘겨웠던가 봅니다
열심히 살았습니다
처음
사랑을 만나
문간방에 보따리 살림을 펼쳐도
그 사랑은 배고픔을 지울 만큼
매일 매일
감동의 아침을 맞았습니다
사랑 하나만으로도 충분히 행복하며
새 가족을 선물 받고
또 그 기쁨에 겨워
정말
힘든 줄 모르고 여기까지 왔습니다
아직 갈무리해야 할 것들이
산처럼 내 앞에 있지만
든든한 내 사랑은
“이젠 늙었나 봐”
한마디 던지며 해를 등져
얼굴 주름 한가득 웃음으로
사랑 보내며 행복해 합니다
어느덧 희끗해진 정수리에
빈자리가 보이고
손끝 까시랭이 가실 날 없는
에미, 애비 되어
문득 돌아본 뒷자리가
밉지만은 않아서 참 다행입니다
반생을 넘어선 오늘
남긴 것도 가진 것도 하나
예쁘게 커 준 아이들뿐입니다
무엇을 하고 무엇을 위해 살았을까
돈도 없고 명예도 얻지 못했지요
지나온 그림자를 보며
후회해야 하나
위로해야 하나
생각할 것도 없이 보듬어 안으며
굽은 등 애썼다 토닥여 주렵니다
지금도
여전히 감동 주는 행복이 작은 방안에 가득 차
둘이 아닌 넷이 되었으니
밑지는 장사는 아닌 게 분명하지요
행복은 평안함 속에 있습니다
평안함은 작은 감동이 주는
파동입니다
비록 빈 주머니일지라도
주먹을 펴면
그 안에 따뜻하게 숨어있는
사랑이 있습니다
찬바람 추위 속에 주먹을 펴
사랑을 꼭꼭 담아
다시
살며시 잡아봅니다
-
시집 마지막에 놓은 ‘당신에게’라는 시는 그녀의 65년 인생이 고스란히 담겨있고, 그녀가 얼마나 넓은 가슴을 가진 인간미가 넘치는 매력적인 사람인지 잘 나타난다.
첫 행에서 “살아야겠습니다”라고 외치며 독자를 긴장시킨다.
분명 꼿꼿이 허리를 세우고 어깨 펴며 살았던 것 같은데 힘겨웠던가 보다 라며 이제 노년기에 접어든 자신의 모습을 인식한다.
그리곤 이내 “열심히 살았습니다”라고 항변한다.
사랑을 만났고, 그래서 태어난 아이들이 주는 행복에 힘든 줄 모르고 여기까지 왔다고 설명하면서 돈도 명예도 얻지 못했지만 밑지는 장사는 아니라고 자신의 인생을 평한다.
요즘 뉴스는 온통 인생을 망쳐버린 사람들 소식뿐인데 자기 인생은 밑지는 장사가 아니었다고 당당하게 말하는 그녀가 부러울 사람들이 많을 것이다.
그런 사람들에게 시인은 마지막 연에서 독자들에게 선물을 준다.
"
비록 빈 주머니일지라도
주먹을 펴면
그 안에 따스하게 숨어있는
사랑이 있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