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8-27

E美지 33호/음악

해금 연주로 한국을 알리고 싶은 양하은

 

 

해금연주자 양하은은 1998년 열 달을 채우지 못하고 6개월 만에 세상 밖으로 나왔기에 인큐베이터 신세를 져야 했다. 몸무게가 겨우 600g인 아기는 나름 살기 위해 투쟁을 했지만 서서히 빛을 잃어가고 있었다. 당시 인큐베이터는 산소 과다로 실명이 되는 경우가 많았다. 


고등학교 3학년 때는 아버지가 갑작스럽게 세상을 떠나셔서 어머니 혼자 2남1녀를 키우셨기에 맏딸인 하은은 항상 어머니의 삶의 무게를 덜어드려야 한다는 생각으로 해금을 배울 때도 장애인예술단체의 오디션을 통해서 기회를 얻었다. 


대학 4년 내내 장학금으로 학비를 마련하였고 졸업 후에는 관현맹인전통예술단 정단원으로 월급을 받기 때문에 지금은 어머니께 용돈을 드리고 있다.

 

 

 

 

​해금 연주자로서 성장하기까지 


6학년 때 <동이>라는 TV드라마를 보면서 해금 소리의 매력을 발견하였다. 그전까지는 해금 소리를 들어도 바이올린 소리에 익숙해져 있어 좋은 줄 몰랐었는데 <동이> 속 해금 소리가 묘하게 그녀의 마음을 울렸다. 그래서 그때부터 해금을 취미로 시작하였다. 집 앞에 피아노학원이 있었는데 마침 그곳에 국악그룹에서 해금을 하는 분이 있어 해금을 배울 수 있었다. 
대학입시 준비는 쉽지 않았다.

국악과가 있는 대학이 많지 않았고 서울대학교 외에는 장애인특별전형이 없었다. 선택의 폭이 좁았던 터라 수원대학교 국악과 정시 일반전형으로 원서를 넣었는데 다행히 합격을 했다. 
그런데 몇몇 수업은 따라가기가 힘들었다. 지휘자의 지휘에 따라 연주를 해야 하는 관현악 과목에서는 시각장애가 큰 장벽이 되었다. 해금은 활의 포지션이 연주에 따라 시시각각으로 바뀌는데 그럴 때 일반학생들은 악보에 표시를 하면 되지만 하은은 악보를 볼 수가 없었기 때문에 속수무책이었다.

교수님도 ‘하은이는 관현악이 어렵겠네’라고 말씀하시어 더욱 상실감이 컸다. 아무것도 못하고 가만히 앉아있기도 하고, 그냥 교실 밖으로 나가버리기도 하였다.
그래도 대학교 4년 동안 하은은 해금 연주자로서 성장하고 있었고, 하나의 인격체로서 성숙해지고 있었다. 

 

 

 

 

음악 활동을 하며 


관현맹인전통예술단 단원으로 활동하면서 가장 많이 하는 공연이 학교나 청소년 쉼터, 병원 같은 곳에 찾아가서 하는 공연이다.

국악이라는 장르가 진입장벽이 높다 보니, 어떻게 하면 관객들에게 쉽게 다가갈 수 있을까 하는 고민을 늘 한다.

 

 

 

 

그녀는 하고 싶은 게 많다. 음악가 양하은을 알리고 싶다는 생각이 가장 크다.

예술단에서의 활동뿐만 아니라 비장애인들과의 협업도 해보고 싶다. 그리고 편곡에 관심이 많아 재즈와 국악을 접목하는 등의 다양한 시도를 해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