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8-27

E美지 33호/미술

시간과 기억을 직조하는 화가 김경희

 

 

1967년 전남 광주에서 고등학교 물리 과목 교사인 아버지와 초등학교 교사인 어머니 사이에서 딸 셋 가운데 맏이로 태어난 김경희는 돌이 지나고 아장아장 걷기 시작할 때 열이 나는 감기 증상으로 병원에 갔다. 주사를 맞고 집에 돌아온 아기는 온몸의 힘이 쭉 빠져서 심하게 앓았다. 그 후 아이는 왼쪽 다리에 신발부터 허리까지 올라오는 보조기를 착용해야 보행이 가능했다. 그때 아기에게 침입했던 바이러스는 소아마비였다. 

 

 

 

 

패션디자이너로서 역량 발휘


우연히 패션 디자이너라는 직업에 대해 알게 되어 전남대학교 의류학과에 입학하였다. 학창시절 판화에 관심이 많아 패션 디자인 컬렉션을 판화로 작업하곤 하였다. 1990년 대학 4학년은 취업을 준비하는 시기라 그녀도 취업 정보에 관심을 갖고 있었는데 톰보이에서 디자이너를 모집한다고 하여 입사 원서를 냈다.
패션시장 조사를 다니고 패션쇼 준비를 하면서 너무도 재미있어 디자이너가 천직이라고 생각했다. 즐겁게 일한 덕분에 패션의 도시 이탈리아 밀라노에 있는 마랑고니(Marangoni) 아카데미에서 패션공부를 할 수 있는 기회도 생겼다.
귀국하여서는 제일모직으로 옮겨 7년 동안 열심히 즐겁게 일을 하여 큰 성과를 올릴 수 있었다. 바쁜 직장 생활을 하면서도 연세대학교 대학원에서 패션산업정보(패션 마케팅) 전공으로 석사학위를 받았다.

 

 

 

 

가정도 중요해   


직장생활 못지않게 중요한 것은 가정생활이었다. 결혼하여 딸이 있었는데 딸이 우리나라 교육시스템에 적응을 하지 못하고 있었다. 17년 동안 패션디자이너로 일을 하며 많은 성과를 올렸지만 김경희 자신도 많이 지쳐 있었다. 그래서 뉴질랜드와 호주 여행을 다녀와서 딸을 데리고 남편과 함께 뉴질랜드로 생활 터전을 옮겼다.
딸은 뉴질랜드에서 유아교육을 전공하고 그곳에서 직장을 찾아 일을 하고 있기 때문에 더 이상 딸을 위해 할 일이 없었다. 그래서 김경희는 다시 한국으로 돌아왔다.


주위의 지인들이 그녀의 능력이 너무 아깝다고 공모전 정보를 주면서 응모를 권했다. 국립중앙박물관 공모에 디자인 응모를 하였는데 당선이 되어 그 디자인으로 굿즈를 제작하였다. 오랫동안 쉬고 있었지만 그녀의 실력은 사라지지 않았던 것이다.
남편도 그녀가 활기를 찾자 그림을 그리는 것을 권했다. 김경희의 그림은 디지털 드로잉이기 때문에 언제 어디에서나 쉽게 작업을 할 수 있는 장점이 있다.

 

 

 


그녀는 개인전시회를 지난해 열었고, 대한민국 여성미술대전에서 특선을 차지하여 화가로서 데뷔를 하였다.
그녀가 그림을 그리는 이유는 그림을 그릴 때 행복하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작가의 시간과 기억을 통해 보는 생명의 아름다움을 다른 사람들에게도 전달하고 싶어서이다.